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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보는 종교 전쟁 평화] 2강, 한국종교와 군사주의 유착의 역사와 현실
[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2강(7/22) 한국종교와 군사주의 유착의 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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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군법사에 대한 문제의식
박노자 교수님의 여름 특강, 그 두 번째 시간은 마이크없이 교수님의 큰 육성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교수님은 왜 당신이 한국종교와 군사주의 유착을 강의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배경을 간단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사실, 이번 여름에 교수님이 한국을 방문한 주된 목적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국군에 소속된 130여명의 군승려를 심층면접하면서, 박노자 교수님은 불교수행자가 따라야 할 불살생계와 군복무가 충돌하는 것은 아닌지 주로 질문한다고 합니다. 무기를 착용한 사람앞에서 설법을 금지하고, 병영에서 숙박을 금했던 과거의 수행전통과 현재 대한민국 군승려분들의 복무 환경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태국 승려들은 군대에서 정신교육을 담당하나 군복을 입거나 계급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도 종군 승려는 있었으나 스님은 결코 군인이 될 수는 없었다지요. 과거 불교 승려들은 사회와 격리된 숲이나 산속 깊은 곳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승가는 국가, 군대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고, 이에 대한 의견 표시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전통에서 국가권력과 승려는 결코 유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기본 5계를 위시한 과거의 엄격한 수행전통과는 다르게 현재 우리나라 군법사님들은 장병들의 정신교육과 군선교를 위해서 장교 군복을 입고 군복무를 하고 계십니다.
2. 군법사님들의 세 가지 답변
Ⅰ.국가주의적인 논리
국가가 존재해야 종교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박노자 교수님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군법사님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몇몇 군법사님들은 스스로 종교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종의 국가지상주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한국 기독교, 천주교, 불교 모두 국가지상주의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유로 특히 한국전쟁이후로 한국 종교계 사이에 갈등이 그나마 최소화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박노자 교수님에 의하면, 군승 원로들은 국가지상주의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는 듯 느껴진다고 합니다.
Ⅱ.전통주의적인 논리
예로부터 불교는 호국정신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책임을 다해왔다는 이야기로, 현재까지 불교집단의 군사화를 합당화하고 있는 주요 근거입니다. 신라의 화랑, 서산대사-사명대사의 의병활동을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삼는 것이지요. 교수님은 조선시대까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전쟁과 축성 등, 왕명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현재의 군승려의 복무모습과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고 전해주었습니다.
Ⅲ.상황론적인 논리
군대는 어쩔 도리없이 현재 우리 상황에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인명살상이 아니라 가족과 평화를 지키위해 군복무를 한다는 의견입니다.
3. 구한말의 상황
박노자교수님은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초기선교사의 대부분은 전쟁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메시지로 강의 본론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시 조선지식인들과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육, 군대 등’은 근대화, 문명화와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문명국가가 비문명국가를 개화시키기 위한 전쟁, 교화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구한말 해산당한 군인들은 학교의 교련교사로 초빙되고, 잘 훈련된 군인을 이상으로 하는 젊은 학생들이 참가하는 운동회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시기였지요. 당시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 수난사 이야기와 조선민족의 상황을 연관지으며, 해방이데올로기로 기독교 신앙을 활용하였습니다. 일제 식민지 당시 조선의 기득권, 유산계급은 종교인으로서 일본군을 적극 지원합니다. 파쇼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인 조선총독부의 명령을 따라 다수 기독교인들은 구약폐기, 비유대적 기독교 실천운동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주기철목사와 같은 예외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운동에 신사참배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시기, 불교에는 잘 알려진 저항자는 거의 전무하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외국 선교사들이 든든한 지원자로 있는 개신교, 천주교에 비해 불교인들은 총독부의 권력(도움)이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조선후기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방한암은 ‘ 임전에 개인이 없고, 오직 국가가 있을 뿐이고, 임사에 오직 공포가 없고 충의가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로 불교와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전 지역의 사찰에 있던 범종을 무기제작을 위해 헌납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 전쟁에 협력하였다고 합니다.
4. 한국전쟁과 군사정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북조선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은 크지 않았으나, 토지개혁(무상몰수)으로 경제적인 손실을 입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하게 됩니다. 월남한 기독교세력은 약 8만 명으로 숫자는 많지 않지만 엄청난 재산을 잃었고, 그 크기에 비례하여 북조선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이 컸을 겁니다. 한경직 목사는 특히 북조선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철저한 반공사상과 기독교신앙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어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후원기관에서 흡족하게 여길 만한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강조하거나 ‘어떠한 형태의 사회주의’든지 배격해야한다는 취지의 글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군목제, 반공시국강연, 징집 지원 활동 등 대한민국군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기독교의 역할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한경직 목사가 조직한 ‘대한기독교구국회’는 1950년 청년 약 3000여명을 세례를 주고 입대시켰으며, 국방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 목사 자신은 베트남전 당시 파병군사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1960~70년대 군사정권에서는 ‘전국신자화운동’을 펼치며,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모든 장병이 하나의 종교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종교단체에게는 교세를 크게 확장할 수 있는 호기였으며, 특히 기독교가 이 조치에 가장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은혜에 보답하듯이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고, 이런 대국가 서비스는 미국교회와 관계를 맺는 주요 목사들로부터의 협럭이 유신독재정권의 정당성 확보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공동의 적인 북조선 앞에서 기독교와 국가는 상호이득을 얻는 동반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5. 베트남전쟁, 또 하나의 성전
주류 종교계인사들은 한국전쟁 때와 유사하게 해당 국가의 전쟁을 성전으로 여기며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이들은 함석희, 리영희, 장준하 선생 등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 지식인들은 베트남전쟁 참전에 열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김활란 전 이대총장은 베트남파병을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유의 십자군’으로 표현하였고, 유호준 목사는 백마부대 장병들에게 ‘아시아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하나님이 군대를 파병하시는 것’이라는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불교집단 역시 기독교와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병 최고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불교신자는 아니었으나, ‘월남파병되는 한국군인들의 대부분은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군승이 없으면 정신교육이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의 말처럼 군목제가 실시된지 10년이 더 지난 1968년에 군승제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적군을 사살하는 불자 군인들에게 ‘그것은 악업이 아니라 극락왕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설법하게 되는 군승려분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6. 한국형 종교적 평화사상의 가능성?
식민지 말기부터 여호와의 증인 등이 종교적 평화실천을 해왔지만, 평화주의적인 종교가 체계화 된 것은 함석헌, 안병무 등 민중 신학자들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 후배들, 조직들이 남아있으나 영향력이 매우 미미하다고 합니다. 신도들이 떠나기 때문에 이런 교회들의 성장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지난주 강의 결론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는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각자가 속한 종교집단의 성직자들에게 군사주의의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반군사주의적인 종교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종교와 군사의 분리는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민중, 일반 평신도의 힘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