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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 5강 - 그리스도교 ② 강좌 후기
세계 종교의 이해 : 5강 (4/02) 그리스도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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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세계종교의 이해’ 오강남 교수님의 특강 다섯 번째 시간은 특수필기능력을 갖춘 한 분의 발표를 듣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서체와 일러스트,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들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짝짝짝~
1. 정결이냐 자비냐?
‘정결’을 중시한 당시 유대사회와 달리 ‘자비’를 강조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레위기에 근거한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깨끗하라)’라는 구호를 예수는 거부했던 것입니다. 대신 예수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스러워라’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아픔을 함께 겪는다는 의미의 자비 정신을 강조한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는 당시 천대받던 걸인, 장애인, 병자 뿐만 아니라 불결하다며 상종조차 하기를 꺼려한 사마리아인, 창녀, 세리 등과 어울렸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중심에 자비를 지닌 사람은 원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존재의 아픔이 보일 뿐, 자신이 뭘 도와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겠지요. 저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했고, 모든 행위에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웃의 범위가 없었던 예수의 삶과 비교해보니...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2. 비유의 맛!
예수는 이 자비를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비가 무엇인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인에 대해 알아볼까요? 유대 지역 중에서 갈릴리 출신이 특히 천시받았듯이, 사마리아인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소위 개무시당했습니다. 왜냐고요? 슬픈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고 주변제국의 침략을 받은 북이스라엘 민족들은 다른 민족과 혼인하는 융합정책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들은 정결예법에 따라 혼혈민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불결한 부류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서, 이 비유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진정한 이웃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아닐까요? 피흘리는 사람이 부정한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치료해주고, 살려주는 사람이야말로 이웃이고, 참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이라 할지언정, 자비와는 거리가 먼 레위인, 제사장보다 더 좋은 이웃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인습적 가치관인 “정결-율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발칵 뒤엎는 예수의 파격성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인습적인 가치관을 ‘돈’ 또는 ‘경제적 가치’라고 할 때, 이에 거부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정신적 영웅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3. 자기를 부인하라
일명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베드로의 반응에 예수는 가장 심한 욕설을 내뱉어 버립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예수는 현세에 집착하는 또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베드로에게서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또는 신중심적인 삶을 강조해온 자신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가장 기본입니다. 자기를 버릴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바울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을 활용했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갈구하는 심층종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부활, 그 의미
저는 지난 3월 31일 여자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서 드리는 부활절예배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가 3일만에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요지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빨갱이 운운하는 시국연설로 변해갈 때 쯤, 여자친구의 동의를 얻어 결국 예배 중간에 나와버렸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부활이 기독교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임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영웅적 존재의 부활은 여러 종교와 신화에서 발견되는 래퍼토리입니다. 3일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기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육체적 부활을 억지로 믿기보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예수의 자비, 사랑의 메시지 -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린다. 자기를 부인한다 - 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5. 마무리
기독교에 공헌한 바울,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정경, 도마복음서의 깨침, 영지주의-마르시온 이단논쟁,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 등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기독교 파트가 마무리될 다음 시간이 더욱 기대됩니다. 참!! 마지막에 은주씨가 소개해준 시를 읽고 과거 어린 시절에 나를 만나보는 체험, 정말 대단했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