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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프랑스혁명사] 1강, 2강 후기
1. 수요일 저녁,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힐링 영화로 주목받았습니다. 첫 시간, 강의 수강 계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역시 영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대상에서 나라의 주인이된 프랑스 민중들의 이야기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도 '통치받음'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의심과 이미 세련된 모습으로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우리를 자극했나봅니다. 그래서 모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사가 궁금한 사람들, 강의 해주시는 최갑수 교수님의 강의를 좋아하는 사람들, 참여연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2. 다른 국가들보다 1세기이상 빠른 '현대'를 시작한 프랑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상과 제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수업을 통해서 혁명 시기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과 헌법을 집어가며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봤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그 때마다 헌법에 반영되면서 17개 가량의 헌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3. 강의의 중심 질문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계속된 불안정성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와 민중이 함께 일으킨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 코뮌 등 다양한 정치적 사건을 겪습니다. 왜 안정된 정치질서를 만드는 데 오래 걸렸을까요. 저는 혁명의 성과가 정치 체제에서 받아드려지는 과정에서의 왜곡, 부르주아와 기득권의 방해를 뚫고 민중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에너지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3-1) 프랑스 대혁명(바스티유 감옥 함락) 이후 입법의회, 입헌군주제가 시작됩니다. 이 때 1791년 헌법이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제1공화정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라 제1제정이 시작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립니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왕정인 셈입니다. 이어서 나폴레옹 폐위 이후 군주제가 복귀 합니다. 이 때 루이 18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혁명기에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를 거의 유지합니다. 혁명의 유산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입법권을 군주, 선거제(물론 일부 부르주아까지만 주어지는 선거권입니다)에 의한 하원,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이 공유합니다. 군주가 독식하던 때와 다르게 타협의 여지가 생긴 셈입니다. 혁명의 결과로 조금씩 권한이 분산되는 정치체제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2) 루이 18세에 이어 샤를 10세가 즉위하고1830년, 7월 혁명으로 폐위당합니다. 7월 혁명은 1827년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지만 결과를 무시하고 일부 언론의 폐지, 새 의회 해산, 새 선거 주문, 투표권의 제한 등 반동적인 왕령을 반포합니다. 결국 파리의 소생산자층이 궐기하면서 혁명으로 비화합니다. 이 때 바리케이드가 등장하고 군대가 발포명령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궐기가 있었지만 지배층은 공화정 대신 (반동적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오를레앙가를 복귀시킵니다. 이 때 중산층의 가장 부유한 부류에게만 참정권을 확대합니다. 여전히 피 흘린 민중들에게는 정치권이 요원합니다.
3-3) 2월 혁명으로는 오를레앙가 복귀로 즉위한 루이 필립이 폐위 됩니다. 참정권 확대가 핵심적인 사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왕과 의회 다수파(앞서 선거에 승리한 야당)의 충돌이 아니라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부와 의회개혁운동의 충돌이었습니다. 후자의 세력에는 프랑스 정치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좌파 세력과 중간층이 합세해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들이 군중들에게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하자 정부는 이들 세력이 모이는 연회 자체를 금지해버립니다. 결국 민중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제2공화정이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참정권이 확대되고 1848년 성년남성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선거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다시 왕당파가 의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당시 농민들은 여전히 가톨릭의 헤게모니, 즉 기득권의 헤케모니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혁명의 보수화를 의미합니다.
3-4)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파 후보를 제치고 나폴레옹의 조카가 당선됩니다. 이후 왕당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제2공화정이 무력화됩니다.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2제정을 세웁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권위주의적 제정이 아닙니다. 제정의 자유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정이 꼭 권위주의와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꼭 자유와 만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하지만 제2제정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붕괴합니다. 이 때 제3공화국이 탄생합니다.
3-5) 제3공화국은 70여년 연속 공화정을 유지하며 계속됩니다. 독일이 세운 괴로 정부인 비씨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물론 안정된 공화국이 성립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프로이센에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막대한 배상금, 알자스 로렌 지방 넘김 등을 포함한 조약이었습니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왕당파 의원들이 일방적으로 독일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를 꾀합니다. 파리 시민들은 이러한 보수파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결국 파리 코뮌이 나타나는 배경이지요. 이 때, 문명의 수도라는 파리에서 18,000여 명이 사망합니다. 많은 좌파들이 파리를 떠나면서 현 파리시장 이외의 모든 시장은 우파였다고 합니다.
4. 혁명 이후에도 공화정은 보수화되고 프랑스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유산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좌 선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중들이 언제나 궐기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실제로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이 당연시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속에 다양한 정치적 지평들이 잉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1)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볼수록 힐링보다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느낍니다. 보수 양당체제로 귀결되는 정당 문화를 생각케하고 또, 오늘의 이 선거결과를 막기위해 저는 무엇을 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수백 년에 걸쳐 변화를 이끌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좀 더 먼 호흡으로 지금 이 순간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두 에너지를 모아봤으면 좋겠습니다.
5. 세 번째 수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물론 강의 내용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갑수 교수님이 보여주시는 강의 열정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강력 추!천!합니다^.^
5-1) 빈 공간이 많은 후기입니다 ㅜ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원활동가 강지은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