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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3강, 백 년 동안의 고독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3강(11/1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1.
수강생들이 들고 온 책들 제목이 저마다 각각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는가 하면 백 년의 고독도 있다. 어느 것이든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구광렬 선생님의 말씀인즉, 제목이 잘못 번역되었다고... 문장 구성 상 제대로 된 제목은 『고독의 백 년』이란다. 고독과 백년 중 백년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또한 여기서 백년의 의미는 a hundred가 아니라 long time이다.
다른 언어로 적힌 문학을 읽으며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 비단 이뿐이겠는가 마는, 나의 경우는 이 책을 읽고 난 느낌 또한 이 책에 대한 평가와 설명의 글들과는 사뭇 달랐다. 다음은 교안 중 일부.
역사적 의미가 아주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과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콜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지 종주국들의 지배와 억압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역사나 크게 다름없었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였듯이 콜롬비아 또한 오랫동안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서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도 이런 설명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책께나 읽는다는 유명인들의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백 년 동안의 고독』...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가 이유였다. 그리고 읽고 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강한 역사적 의미 내지 억압된 역사의 상징 같은 것을 떠올리진 않았다. 그저 팍팍한 인생살이 대한 담담한 시선과 길고 험한 역사의 흐름 앞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월적인 묘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여전히 내게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만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과연 성공적이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일방적인 나의 느낌이지만, 그런 부조리한 역사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통찰도 그 어둠의 세월을 살아내야했던 이들에 대한 강한 연민의 느낌도 찾을 수 없다는 것. 마르케스가 ‘팩트’의 강도를 순화시키기 위해(고발중심의 르포가 아니라 문학성을 지닌 소설을 위해) 사용했다는 마술적 장치들이 오히려 정도가 지나쳐 분노해야 할 순간 앞에서 그냥 스쳐 지나게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해야 할 순간 앞에서 그저 한숨을 내쉬고 금세 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라틴 아메리카가 지닌 핏빛 슬픔의 순도를 정도이상으로 떨어뜨린 것은 아닌가... 하고 강의를 들으며 혼자 속으로 웅얼거리다 말았다.
2.
구광렬 선생님의 강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재밌다. 추운 날씨 탓인지 저번처럼 신발을 벗진 않았지만 전보다 열정의 강도가 떨어지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2시간 남짓 듣고 있다 보면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언젠가 우리와 인종학적으로 같은 핏줄(몽고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의 구원을 위해 그와 함께 행동에 나서게 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가 전해주는 중남미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은 중남미의 문화와 현실에 대한 궁금증들을 해결해주기 보다 오히려 더 궁금하게 만들고 더 알게 싶게 만든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가 특히 그렇다.
“마추픽추가 불가사의라구요? 아니요, 그보다 그 비옥한 땅에서, 엄청난 자연의 혜택을 입은 그 땅에서,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의 굶주리고 고통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게 바로 라틴의 최대 불가사의지요!!!”
백인이 95%인 아르헨티나(인디오들을 모조리 죽여서 그렇다네요, ㅠㅠ)를 제외하면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대부분 백인과 인디오들의 혼혈인 메스티조의 땅이다. 그런데 그 메스티조들의 정체성이란 게, 자신의 반은 자신의 조상과 그들의 땅을 피로 물들였던 백인 약탈자로부터 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그들에게 목숨과 더불어 모든 걸 잃어야 했던 원주민에게서 온 것이니, 그들 스스로도 어느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도 못하고,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런 상태라고. 또 라틴의 사람들은 확연한 국가관이나 민족의식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서로 뭉치는 힘이 필요할 때 구심점의 역할을 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나’의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그렇게 미워하는 ‘미국’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재설정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들이 라틴의 사람들이라니... 그것이 단적인 예로 푸에르토리코는 국민들이 모두 미국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의 나라, 즉 미국의 일부분이란다(위성국가?).
3.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고독의 백 년』에서 대체 ‘고독’은 뭘 의미하는지 물었다.
마르케스의 다른 작품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나오는 대령이 오지도 않는 연금을 끈질기게 그러나 한없이 무기력한 자세로 기다릴 때의 고독, 그것이 바로 라틴의 고독이라고 구광렬 선생님은 말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삶에서 피지컬하게 느끼는 ‘고독’을 라틴에서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춤추고 놀기도 바쁘단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웬만한 춤들의 원산지가 바로 라틴아메리카다.
고독의 백 년에서 ‘고독’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의 ‘정체(停滯)’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잃어버린 조상의 이야기, 그들이 공유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색이 다른 이웃의 이야기 그리고 찾아야할 것이 무언지조차 잃어버린 이들의 황망한 이야기들이 라틴을 고독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은 늘어지고 시간은 무기력해지기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마르케스 본인이 말하는 ‘고독’은 더 심오한 차원인 것 같다. 노벨상 수상연설문에서 그가 한 말을 옮겨본다.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롭게 만들며, 갈수록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드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백년의 고독』해설서(유왕무 저, 살림)에 실린 대목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유럽인들이 자신만의 사고방식과 논리적 잣대를 버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있는 그대로 판단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 해소될 수 있다는 탈중심주의적, 탈식민주의적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그렇다, 언제나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수용이다. 그들을 그들의 독득한 역사와 문화 안에서 이해한다는 게 라틴아메리카 근처에도 못 가본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해가 아니라 그저 고개를 끄떡여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존중해 주는 게 먼저고 그게 가장 올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기엔 내 지식과 경험이 너무 천박하지만 아직 강의는 2주나 남지 않았던가.... 멕시코 현지에서 공부하고, 일상을 살고, 스페인어로 시를 쓰던 한 남자의 지혜에 기댈 수밖에!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저는 2권 읽으면서 '고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고독앞에 대처하는 각자의 태도, 그 사회의 분위기...가 다를 뿐이겠지요.
고독은 인간의 힘! 아닐까요.
광고 하나 덧붙이자면, 제 후기는 4강에도 이어집니당~~~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