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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이 나라를 걷다 보니 원전이 54기
교과서도 CM도 말했었지, 안전하다고
우리들을 속이고 변명이라는 게 ‘예상 밖’
그리운 그 하늘 가려운 검은 비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역시 들통났네
진짜 거짓말이었던 거야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건
(중략)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도쿄전력도 훗카이도 전력도 주부전력도 규슈전력도
이제 꿈같은 거 꾸지도 않지만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그런데도 계속할 생각이야
진짜 시궁창이었던 거야
뭔가 하고 싶은 이 기분
일본의 인기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가 자신의 히트곡을 개사해서 부른 <다 거짓말이었어> 라는 노랫말입니다. 수업시간에 직접 동영상을 통해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노래는 일본에서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을 중심으로 울려퍼졌고 결국에는 사이토 가즈요시가 속한 레코드 회사(원전 건설회사인 東芝의 자회사 EMI Music Japan Inc.)의 강력한 요구로 인터넷에서 삭제되는 소동을 벌이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일본에서는 가히 재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건이었죠.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전력회사, 관료, 정치가, 언론,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 했고 오히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선전을 전개하며 공분을 샀습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두 번째 시간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저항가요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2011년 일본, 그리고 2008년의 기억
2011년 7월 16일 도쿄의 한 광장에서는 17만 명의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국민들이 분노한 것인데, 이런 대규모 집회는 일본에서 무려 4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에서 들려드린 <다 거짓말이었어>라는 저항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2008년의 광화문 앞거리를 기억하시나요? 굳건한 ‘명박산성’앞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짦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외쳤었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도 <다 거짓말이었어>도 ‘눈앞의 사익보다 생명’을 외치는 시민들의 중심에서 시민들의 깃발이 되고 무기가 되고 심장이 되었”다는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규모도 성질도 다른 한국과 일본의 두 사건을 ‘저항의 노래’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52년만에 ‘10만 시위’… 日국민 입열다
http://media.daum.net/foreign/newsview?newsid=20120725031104068
일본의 저항가요
저항의 노래는 혁명가, 노동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결국 체제에 반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노래들을 모두 저항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묶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노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인데, 임경화 선생님은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저항가요의 연대기를 책 한권 분량으로 쓸 수 있다고 하시니,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일본의 저항가요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요? 그동안 한국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수입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의 저항가야말로 일본의 재무장-제국주의화에 저항하고자 했던 움직임이었고 일본 저항가의 역사 속에는 조선과 일본의 연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이른바 전공투 세대가 있었는데, 69년 3월에는 고등학생들도 데모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대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등의 저항운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반전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일본에서는 포크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저항가요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이었고 계급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저항가요를 불렀기 때문에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의 악기였던 기타를 써서는 안된다는 논의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카다 와타루는 <기동대에 들어가자>라는 노래를 불러 유행시켰는데, 이 노래는 ‘자위대에 들어가서 꽃처럼 산화하자. 악의 축을 쳐부수자’라는 가사를 통해 오히려 일본이 군비증강을 통해 이미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자위대에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2011년에는 원전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개사하여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인터내셔널가>의 도입
일본의 경우에는 청일전쟁 이후 후발자본주의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면서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쳤고,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1901년에는 사회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생겨났는데, 아마도 이 무렵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일본에 전해였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한국의 병합은 일본에서는 국내적으로 저항세력을 초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0년도에는 일본 내의 좌파세력이 대부분 제거되기에 이르렀는데, 변혁운동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였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민중들의 봉기는 쌀값봉기, 보통선거권 투쟁 등으로 옮겨갔고, 1920년대에 제1회 메이데이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설되고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지면서 <인터내셔널가>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적기가>나 <군가>등도 개사하여 들어왔는데, 이러한 유명한 저항가 중에는 기숙사 노래 등을 개사해서 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외국곡들을 번안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에는 검열이 너무 심해서 ‘부르주아 계급을 쳐부수자’라는 가사 등이 들어가면 발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인터내셔널가> 번역은 전혀 혁명가요 ‘스럽지’ 않은 형태로 번안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인지를 밝히지 않고 다만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자’는 식으로 일본의 무사도와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혁명 저항가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창작곡을 만들어야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가>와 <적기가>가 불려지는 것은 차마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저항가요들이 금지되고 좌파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허밍이나 라라라 등으로 바꿔 부르거나 소비에트 등의 가사를 쓸 수 없어서 ‘빛의 나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문학동맹이나 음악동맹 등이 많이 생기면서 PM 활동이나 가집 편집, 레코드 취입, 메이데이가, 라라라행진곡(인터내셔널가 허밍버전), 창작곡 제작, 음악회 개최 등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과의 연대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PM이 편집한 최초의 가집 <프로레타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저항가요의 조일연대는 제3회(1922) 행사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단체가 참가하고 제4회(1923) 행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고, 오사카 메이데이 슬로건으로는 “일조노동자 단결하라”가 채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10월호에 발표된 김용제의 시 <사랑하는 대륙이여>에 하라 다로가 첼로 반주의 혼성 4부 합창으로 작곡한 곡이 제4회 프롤레타리아 대음악회(1932)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나 검열로 인하여 삭제되어 연주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저항가요에서 조일합작의 효시를 이룬 작품이었습니다.
패전 이후에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많아지면서 1950년대에는 메이데이 참가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60년대에는 전공투를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절정에 달했지만, 이후 고도성장에 따른 소비사회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저항운동의 불씨가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원전사고를 계기로 40여년 만에 일본의 거리에 저항의 노래가 다시 울려퍼지게 된 것입니다.
우타고에 운동의 전후사
우타고에 운동이란, 패전 후 일본공산당의 혁명운동과 깊은 관련성 속에서 합창을 중심으로 하고 서클활동을 기반으로 전개된 음악운동을 말합니다. 우타고에는 전쟁 전 PM운동의 유산을 전승하면서 사회주의 음악문화의 직수입, 전문가 집단의 인민에 대한 봉사, 공동 창작은 물론 노동운동과 반전평화운동,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일본사회에서 5%정도 밖에 되지 않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우타고에가 48년 전학련의 결정에 맞춰 동경대학의 합창 서클을 지도하면서 일본공산당과 관련된 조직 중에 유일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운동조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때마침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행한 수폭실험에 일본어선이 휩쓸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에 맞춰 일본공산당이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반미운동의 움직임이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1954년의 수폭금지운동,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거치며 우타고에 운동이 크게 성장하였고 이 운동의 가집들은 숨은 베스트셀러로 확산됩니다.
원수폭금지운동의 상징이 된 노래인 <원폭을 용서하지 않으리>는 ‘고향땅이 불타버리고 육신이 사라진 땅, 용서하지 않으리’ ‘히로시마 나가사키 비키니.. 세 번째는 피폭당하지 않으리, 세 번은 용서하지 않으리, 세 번은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가사를 통해 일본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원수폭금지운동의 중심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운동노선이 국제운동보다는 민족운동에 집중되면서 점차 혁명성 있는 소련의 가곡들이 덜 불려지게 되었고, 대학생들은 우타고에 운동의 중심이 노동자에서 국민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저항가요는 함께 부르는 형태에서 소비되는 형태로, 그리고 합창을 하지 않는 세대로 이행되면서 점차 우타고에 운동은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5월 광주정신'을 노래하는 일본인들 http://news.nate.com/view/20120517n34751
5.18 민주화운동 32주년을 맞은 지난 5월, 광주에서는 우타고에의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사회적인 위기나 모순을 깨는 강력한 첫 목소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저항의 노래는 민족을 넘고 국경을 건넙니다. 2008년 광화문 광장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울려퍼지고 2011년 도쿄 고엔지에서 <다 거짓말이었어>가 불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질 한국의 저항가요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