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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은 "3.1 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라는 제목으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첫 시간이라 가는 길에는 설레고 막상 도착해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첫 시간은 텍스트를 복사해드렸는데요, 앞으로는 복사해드리지 않고 각기 텍스트를 준비해 오시길 부탁드리며 책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나온『인문정치와 주체』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3.1운동, "씨알의 역사"의 신기원
3.1운동에 관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까만 치마와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유관순,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힘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층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혼재하는 복잡한 현실은 그것이 역사화되었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3.1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며, 이는 유관순과 같은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될 수 없다. 3.1운동은 역사학자 박은식에 따르면 "씨알의 역사", "자주하는 민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 3.1운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민중이었으며 이 3.1운동을 통하여 민중은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민중, 주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일원적인 존재가 아닌 다양한 존재이다. 민중의 요구사항과 투쟁 원인은 다양하였으며 이는 3.1운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 예컨대 일제에 의한 피해 이미지, 민족 대표 33인과 같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오히려 3.1운동은 민중이라는 다양한 주체들을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의 저항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그 이전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다룬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건은 있어왔다. 1907년부터 1911년은 저항하는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1910년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조약에 의해 간단히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다. 단순히 뺏김/안 뺏김으로 볼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말이다.
식민 정치 체제는 “국가 폭력”의 형태로 경찰과 군대식 체제로 이루어져(커밍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경찰의 권한은 굉장히 포괄적이었으며 상당히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경찰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일상자체가 국가 폭력에 항시 노출되었다. 이는 3.1운동 시 경찰서를 습격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식민 정치는 ‘정치적’ 차원 뿐 아니라 일상의 영역 곳곳을 파고들었다. 사법체계에서도 재판 없이 구류, 태형 등의 처분이 가능하였으며, ‘의생규칙’을 통해 한의를 개편하는 등 사람들의 생활관습 또한 개화라는 명목으로 개조하였다. 이런 식으로 불만이 1919년 3.1운동까지 누적되었다.
3.1운동의 양태
3.1운동 이미지의 중심은 2.8독립선언과 33인 선언,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식인층의 독립 선언은 분명 계기를 제공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 정치로인해 지속적으로 쌓여 온 민중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에 가깝다. 아울러 3.1운동은 서울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퍼졌으며, 지방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
일제가 이후 조사한 3.1운동의 원인에 따르면 민중들의 불만은 단순히 식민 지배/피지배의 구분을 넘는 더욱 다양하고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양반, 유생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부역이 과중하다는 점, 행정관리의 오만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불만이 결집된 것이 3.1운동이었으며, 대개 그 불만은 식민 지배와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구체적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시위 형태도 다양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시위꾼, 만세꾼이 국가 권력에 통제되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돌며 독립을 외쳤으며, 한밤중에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체포 기록을 보면 농민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같은 상인들도 상당수였는데, 이들은 동맹파업, 일본인에게 물건 안 팔기 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민중의 재발견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실패한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3.1운동은 민중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식이 성장하였다 할 수 있다. 3.1운동의 “실패”를 통해 왜 우리가 짓밟혔나를 생각게되었으며, 점차 걸음마 단계였던 민중의식은 의식화, 조직화 된다. 지식인층(젊은 학생층)은 이제 봉기뿐 아니라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농민과 같이 봉기해도 하대하던 의식이 있던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점차 지식인층은 농민층의 사람들과 조직해야 함을 깨닫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민은 대상화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하는 존재로 생각되며, 민은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가 된다.
20년대는 이러한 의식화와 조직화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시기이다. 조선노동 공제회가 출현하였으며, 192,30년대에는 서울 청년회 조선 공산당이 출현한다. 19세기에도 이념이나 사상은 존재하였으나 주로 지식인 중심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점차 다른 계층에까지 퍼지게 된다. 이에 따라 지식인이 지방에 내려가 야학, 강연회를 여는 등 구체적 일상과 사상이 접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공식 역사에서 빠져있고, 보통 3.1운동 이후는 암흑기로 다루어진다.
강의를 마치고
무언가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와 정말 혼란이다.”이다. 지금 당장 여기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후에 어떻게 기억될는지 명확하게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 너무나도 다양한 관점이 얽히고 섥혀 바로 옆에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그 사건과 나의 시간적, 심리적 거리와,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그 성격이 상당히 단순화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은 막연히 조선독립을 외친 사건, 비폭력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관순 판결문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고, 민중의 요구도 어떠한 거대담론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일상과 닿아 있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난 어떠한 이념이 저항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거대담론으로만 저항의 주체가 해석될 경우, 그것 또한 개별 주체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주체’라는 한 단어로 묶여있으나 그 주체는 너무나 다양한 개인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1운동의 주체를 다각화한 이번 강의는 그때 당시 사람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울러 예전에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중 조선 후기 공론장의 태동과 관련된 강의가 떠올랐다. 3.1운동에서 민중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지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1889년즈음부터 시작된 민의 성장과 더불어 해석이 되었다. 19세기 말 신문을 함께 읽고, 각 동네마다 연설장을 만들고 서울에는 19일동안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조금씩 성장하던 민중이 3.1운동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 이후 더욱 조직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화 통치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이러한 민중은 시민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 몫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원활동가 김수진.
정리가 잘 되어서 1강을 놓친 분들도 큰 도움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