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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4강 - 오르한 파묵<이스탄불> -파묵의 이스탄불 그리고 우리의 서울 (4/25)
오르한 파묵을 다룬 세번째 수업이자, 이슬람 문학 수업의 4강은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다뤘다. <이스탄불>은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이다. 그러나 한 유명한 소설가의 자전 에세이라 하여, 자의식 충만한 예술가의 '난 어떻게 성공했는가'라는 자기자랑 가득한 자서전이라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스탄불'이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이스탄불에 대한 서술에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에서 지금의 변방의 도시로 전락한 이스탄불의 비애어린 영혼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는 주요한 분위기로 자리잡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서술이든 이스탄불에 관한 서술이든, 책의 곳곳에서 음울한 흑백의 색깔을 띤 이스탄불의 '비애'를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재능있었고 뛰어났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자 자신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스탄불'과 그 이스탄불 속에서, 이스탄불의 영혼을 흠뻑 머금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스탄불의 수많은 폐허들과 뒷골목을 아주 좋아했다. 오르한 파묵이 방황하던 젊은이였을 때, 그는 이스탄불의 골목 골목을 수도없이 걸었다. 이 책을 읽은지 몇 달이 지나서 내용의 대부분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던 이스탄불의 지저분한, 곳곳에 폐허가 있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의 골목들과 그 골목들을 찍은 흑백사진들만은 여전히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가 말한 이스탄불의 '비애'라는 것도 이렇게 이스탄불 곳곳을 걸으면서 느꼈고, 그도 모르게 흡수했을 것이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의 과거의 위용을 슬프게나마 보여주는 폐허들, 폐허, 화재터, 허물어진 벽들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골목의 빈곤함과 지저분함 속을 걸으면서 말이다.
"한편 이 죽은 문화, 몰락한 제국의 비애는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는 내게 서구화와 현대화 바람보다는 몰락한 제국이 남긴 슬픔을 안겨주었고, 가슴 아픈 기억들로 가득찬 물건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허둥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갑자기 죽은 아름다운 애인이 남겨 놓은 파멸적인 추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옷, 장신구, 물건, 사진 들을 다급하게 버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강하고 새로운 것, 서구적 혹은 토착적인 현대적 세계를 건설하지 못했기 대문에 이 모든 노력은 더더욱 과거를 지우는 셈이 되었다. …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서서히 나의 내면에 영향을 미친 이 모든 이상함과 슬픔을 나는 답답함과 침울함으로 어린 시절에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도시 곳곳에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비애'란 영혼을 잠식하는 슬픔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승화된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비애'는 그의 예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변두리 마을로 놀러 가면, 그림을 보듯 멈춰서 보고 싶은 이러한 '회화적인' 아름다움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어느 시점 이후에는 우연이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날은 대부분 사라져 버린 그 침울한 폐허들은 내 어린 시절 이스탄불의 영혼이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당시에 내가 도시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의 '발견'과 그것이 아름답고 '정수'라고 결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우연들과 많은 반응이 있는 에움길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렇듯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음울한 영혼과 그 영혼 속에서 비애에 젖어 고군분투하던 오르한 파묵, 그리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을 발견하고, 창조성과 삶의 원동력을 이끌어 낸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파묵의 예민한 감수성에 감탄하게되는 동시에, 그러한 감수성을 자라날 수 있게 해준 이스탄불이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이난아 씨와 수강생들 모두가 공감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모두가 서울을 떠올렸다. 왜 서울을 치밀하게 느끼고 표현해낸 작가는 한국에 없는가, 과연 서울에 예민한 감수성이 자리잡고 발 디딜 틈이 있는가 등등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 했다. 난 이날 오갔던 많은 이야기들 중 서울이 "괴물이 되어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끊임없이 덩치를 키우며 뿌연 김을 토해내는 서울, 온통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들이 빽빽히 숲을 이룬 서울이 떠올랐고, 무서워지는 동시에 안타까웠고, 그 안에 사는 우리가 불쌍해졌다. 젊은 시절의 오르한 파묵처럼 정처없이 걸어다니길 좋아하던 내가 서울의 곳곳을 보며 느꼈던 '멍해지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그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도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은 '흔적'이 없는 도시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켜켜이 쌓여온 '흔적'이 온통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도시다. 그로 인해 '쌓여온 시간이 이어져 존재하는 지금의 공간, 그리고 그 속의 나'를 느끼게 할 감수성은 용납되지 않는 도시다. 사실 나는 흔적이 '사라졌다'라는 표현보다는 '살균'되고 '소독'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스탄불을 지배하는 감정이 비애라면 서울을 지배하는 것은 '강박'이다. 빈곤함, 지저분함, 불편함, 이러한 모든 것들을 살균하고 소독하려는 도시의 '강박'. 이 강박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과거의 흔적을 안고 있는 일부분, 즉 문화유적들과 오래되고 빈곤한 동네들은 쌓여온 시간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박제화 되었거나 드높은 콘크리트의 위세에 눌려 불안함과 위태로움 속에 연명한다. 서울은 정말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쾌적하고 깔끔한 괴물이다. 강박이 만들어낸 살균과 소독의 풍경은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시선에 대한 폭력이자 감수성에 대한 폭력이다. 그러나 현대화된 서울의 쾌적함과 깔끔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수업은 오르한 파묵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작했다가 우리와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났다. 이 수업에 모였던 한줌의 사람들만큼은 서울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불쌍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짓고 있는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이 떠올랐다. 동시에 서울을 괴물로 만든 것은 불결하고 가난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욕망으로 미친듯이 질주해온 '단절의 근대화'라는 생각을 했다. 100층이 넘는 높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제2롯데월드는 바로 이 '단절의 근대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하지만 이러한 광풍 속에서도 감수성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던 수업이 떠올라 조금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이난아 씨가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을 쓴 것은 서서히 거세어지는 이스탄불의 개발 바람에 대한 저항이자 사라져가는 '비애'의 이스탄불을 영원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이보다는 훨씬 미약할지라도 이 날의 수업도 괴물이 되어가는 서울에 대한 조그마한 저항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스탄불을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 오르한 파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