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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
해방공간의 쟁점들
1945년 8월 15일, 36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의 지배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3년 간 이 땅에는 정부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군정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이 땅에 제대로 된 정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그 3년을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역사에서도 해방 3년사라 하여 따로 다루고 있다. 고작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수립의 열망과 좌우익 간의 정치 투쟁이 뒤엉켰고, 시위와 폭력, 암살과 실종이 혼재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남쪽과 북쪽으로 찢어졌고, 남북 인민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공간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독립과 민족의 시간이었던 근대를 넘어 극단의 이념대립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교과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따로 떼어 가르쳤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의 첫 번째 강의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
알다시피 모든 것은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같은 날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독립을 맞았고,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때 독립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건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패전국이었고 식민지 조선은 그 일부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식 이름을 갖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일제는 전쟁 중이었고 그만큼 폭압적이었다. 독립운동은 중국 등지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졌을 뿐, 한반도나 만주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36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기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천황의 신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가 이미 성인이 되었을 시점이다. 한국을 독립국으로 보는 인식은 국내외적으로 미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분명히 말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점령한 두 열강, 즉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숙명론이 그나마 일리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해방이자 광복이자 독립이라 불리던 그 순간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해방공간에는 더 많은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광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광복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그 순간, 대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15일에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디오 자체가 흔치 않았던 시대다. 일본인들이 패색이 짙어가는 전황을 친절하게 알려 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당대 지식인들도 별 수 없었다. 서정주, 이광수 같은 이들은 열렬히 귀축영미를 저주하고 천황폐하만세를 부르짖으며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떠밀었다. 오직 여운형을 비롯한 소수만이 국제정세를 면밀히 살피며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이 도둑처럼 왔다'는 표현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우리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걸로 '식민지'가 끝난 건 아니었다.
일제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여운형과 교섭을 통해 전권을 건준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넘기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도 항복을 위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군은 패전 후에도 미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올 때 환영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고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일본군이었다. 해방이라지만, 그 시작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온건하지는 않았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과정도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많다. 일단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다만 양국 군대가 들어온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련은 8월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격했고 미국은 9월 8일에야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남쪽까지 접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길게는 한 달에 이르는 이 기간에 소련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38선 이남까지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한 미국의 요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보다는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소련의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국내 상황 역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은 갑작스러웠고 권력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공백을 채운 것은 혼돈이었다.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들은 대부분 자치 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중도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당시 국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던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펼쳤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자파의 정치적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분명 무정부상태였던 해방공간에서 헤게모니의 선점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연합국은 한국인들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반도 내의 어떠한 정치 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합의 역시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거기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어쨋거나 그들은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보고 대처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해방공간의 정치활동과 국제정세를 함께 바라보면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패전국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각각 항복하는 등 정치적 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해방공간의 치안권을 얻었음은 물론 분단의 운명마저도 한반도에 떠넘길 수 있었다.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일본은 물러갔고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어떤 이름을 달고 이 땅에 들어왔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7차 교육과정의 금성교과서에 소련을 '해방군'으로 서술한 부분이 격론을 불러온 이유도 그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는 일임도 분명하다. 과연 미군은, 그리고 소련군은 점령군이었는가? 아니면 해방군이었는가?
그 실마리는 양군이 어떤 식으로 한반도와 한국인을 대했는가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먼저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련 '군정'이라할 만한 직할 통치기구를 두지 않았다.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인민위원회를 인정했고, 소련군 휘하 특정 부서에서 민정사업을 담당하는 형태로 한국인에게 접근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쉬운 직접 통치 대신 자문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왔음을 자임했고, 46년 2월부터는 선거를 시행해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물론 이런 통치방식이 순전히 소련정부의 선의는 아니었다. 소련 역시 한반도 내에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다. 한반도의 정치지형도가 소련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지역에는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은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서북지방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황해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고 자본가, 지주들의 세력도 강했다.
소련입장에서도 이들을 무시하고 북한지역을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합작체제를 주장했고 모든 기구를 성립할 때도 양측의 인원이 반수가 되도록 조정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중재는 언제나 소련의 몫이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에 유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북쪽 지주 자본가들은 월남을 선택하게 된다.
반면, 미군은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자신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서울에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사령관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직접 통치 형태로 남한을 접수했다. 미군의 통치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우선 한반도 내에 자생적으로 수립되어가던 모든 정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는 물리적으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영어가 가능하며 행정경험이 있는 이들-거의 일제의 관리 출신인-위주로 미군정을 보좌할 한국인 행정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일제의 행정조직을 복원한 셈이다. 그리고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임을 천명했다. 각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달고서야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신탁통치의 진실 혹은 거짓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독립 역량을 키울 때 까지 대신 지배하는 위임통치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몇몇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식민지였다. 이들 중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존재하던 위임통치령이 국제연합 소속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 중에도 이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던 이가 있다.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미국 의회에 "조선은 독립할 의지가 있으나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일본이 그것을 가로 막고 있으니 우리가 독립할 능력을 키울 때 까지 미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임통치 해 달라" 며 청원서를 낸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 때문에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그리고 20여년 후, 해방 공간에서 다시 신탁통치론이 등장한다. 바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에 쓰인 내용이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36년 만에 맞게 된 해방,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진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간신히 독립한 조국이 다시 강대국의 사실상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했다는 불안감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미국을 지지하며 이 움직임에 편승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오보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분명히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미, 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임시 정부와 협의를 거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한반도에 대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회의 결과는 12월 28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예정보다 하루 전에 미리 회의 결과를 기사로 내버렸다. 그것도 잘못된 형태로.
이는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게다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은 당초 20년 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그 합의점으로 나온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다.
당시 우익의 뜻을 대변하던 동아일보의 의도적 왜곡 보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운 이 사건은 거국적인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저항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다. 특히 좌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소련의 발표를 통해 회의 결과를 정확히 인지한 좌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지지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미 반탁으로 기운 대중들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곧바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게다가 이승만, 한민당,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을 찬탁론자로, 나아가 매국노로 몰아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우익의 상당수를 점하던 친일경력자들은 애국자라는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잡았다.
한편 김구의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반탁을 위한 총파업을 지시했고 당시 서울시 공무원의 70%이상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에 놀란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김구를 불러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끝났지만, 김구는 이 짧은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향력과 법통성을 선포하고자 한 셈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두 국가의 신탁통치 개념이 가지는 차이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말하자면, 영어와 러시아어의 어감 차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신탁'을 의미하는 영어 trustship은 권력을 맡기는 의미였지만 러시아어인 oneka의 경우는 일종의 후견이라는 뜻이 더 강했다. 당시 남쪽에서 회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북쪽에서는 '후견제'로 보도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정통성, 그리고 정당성
김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한반도에는 각각 남한과 북조선이라고 불러야 할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정부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자신이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도대체 정통성은 무엇이며 정당성은 또 무엇일까? 뉴라이트 측의 주장처럼 경제력으로 이겼으니 정통성은 우리가 가져온 것일까?
정통성의 근거는 기존 정치 공동체의 적통 계승여부에 달려있다. 때문에 왕조국가에서는 왕가의 혈통이 흔히 정통성으로 기능한다. 이와 달리 정당성은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지받고 인정받은 권력에게 부여될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제헌 헌법과 유엔에서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말을 근거로 즐겨 내세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근거는 모두 설득력이 약하다.
우선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인사들이 당시 건국정부에 참여 했으니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해방공간 정치 지형도에는 적지 않은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익인 한민당에서 극좌파 조선 공산당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해방공간에는 존재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와 연대하는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해방된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정치적 위상과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대표성과 규모라는 측면에서 당시 임정이 하나의 정치세력 이상이 아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부분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 아니, 사실상 날조에 가깝다. 그 근거의 원문인,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는 '선거가 가능하였던 38도선 이남에서 정통성을 가지는 유일정부임을 인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제헌 헌법과는 정면으로 부딪힌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정한 적 없는 한반도 이북 지역의 통치권을 우리만 되뇌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통성이 유엔을 비롯한 승인에서 나온다는 발상이 과연 건전한지도 의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비자주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정통성을 타국의 인정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우를 보자. 일단 북한은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건국 초기에 친일경력자 숙청을 완료했다. 북한은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남한보다 조건이 좋았던 셈이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최고지도자의 대표성을 담보해 줄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숙청당한 이들 중에는 친일파 외에도 반김일성 세력이 적지 않았다. 민족적 과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북한의 정통성도 생각만큼 공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정치적 정당성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이루어졌던 토지개혁과 남북한 총 선거에서 찾았다. 인민에게 지지받고 인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다만 토지분배는 차치하고서라도 선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총선거를 통해 남북한 지역 대의원(최고 인민회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렇게 1000명이 해주에 모여 남측 대표 210명, 북측 대표 360명을 선출하고 김일성을 최고주석으로 삼아 내각을 구성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 내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였다. 정상적인 선거는 애초에 가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말하는 남북 총선거란 사실 북에서만 이루어진 반쪽짜리 선거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원 등에 의한 비밀선거가 이루어졌지만 대표성도 실효성도 없었다. 이렇듯 허점투성이였던 선거는 결국 북한 정부의 정당성에도 한계로 작용했다. 결국 비판의 여지는 양쪽 모두에게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남북한 양국 정부의 정통성-정당성의 근거와 그 한계를 통해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독립 정부가 반드시 가져야 했던 적통의 이상적 형태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한반도 인민의 열망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정치적 대표성을 이어받아야 했다. 또한 전 국민의 합법적이고 폭넓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 공동체임을 떳떳이 자임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의 남북한 정부 모두 자신들이 바로 그런 정부임을 주장했었고,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둘 중 이런 이상에 좀 더 합당한 정부는 어디였을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독립정부 수립을 위하여
앞서 말했듯이 해방공간은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크게 보아 좌우익 세력은 비등했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노선이 다른 무수히 많은 조직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방향성에서 같은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1차적 목표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독립이었다. 이는 당대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탁운동 과정에서 당시까지 열세였던 우익세력이 정국 장악의 결정적 계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던 독립의 열망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 세력 간 노선은 분명히 달랐다. 특히, 좌우익간의 대립은 격렬했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중요인사가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중단 이후 좌우 정치세력이 각자 독자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은 정읍발언과 함께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구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친일경력자가 대거 포함된 반탁 운동 세력은 이승만 쪽으로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반탁운동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김구, 김규식을 필두로 하는 중도파는 남북 분단을 막고 통합정부 수립으로 가는 방향을 꾸준히 모색했다. 김구가 이미 단독정부를 수립한 북측에 협상을 제의하고 북한행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 때 이루어졌던 남북 협상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이 참석했고 외국군대 철수와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김일성측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행보는 결코 가볍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서울로 돌아온 날은 5월 6일이다. 남한의 단독선거일은 5월 10일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이 죽고 없는 남한에서 김구는 이승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일생의 영광이 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거의 승산 없는 회담을 위해 북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김구를 그저 무모한 민족주의자라는 식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현재 뉴라이트 역사학파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반면, 김구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자 테러리스트로 평가한다. 어찌되었건 남한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일개 야인으로 암살당한 김구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행보를 정치적 결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이승만과 정치생명을 포기해 가며 좌우 합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구를 정치적 성패만으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도 그렇다. 물론, 김구의 의혈 투쟁을 영어로 번역하면 테러리즘이다. 사실 정확히 의혈 투쟁을 표현할 단어를 영어에서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폭력 투쟁에 의존해야만 할 만큼 억압에 직면했던 당시 상황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의 결의를 담기에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너무 얄팍하다.
또한 김구의 독립운동이 현대의 테러리즘와 같은 형태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주로 일본 제국 정부 요인을 대상으로 한 의혈투쟁을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늘날의 테러와 함께 취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수가 아닐까.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 애국자의 자세
2011년인 지금, 남북 분단의 역사도 어느덧 60여 년을 넘기고 있다. 그 60년 동안 남한은 경제발전을 통해 현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고, 북조선은 폐쇄적이고 배고픈 사실상의 왕조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신자유주의 지향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북한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단정하고 그 존재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유 대한"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오늘날의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현대사 자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의미한다. 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감안하고서라도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최소한 초기 자본주의의 폭주와 비인간성에 제동을 걸고 꾸준히 이의를 제기하는 기능을 했다. 소위 수정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 적인 구석이 적지 않다. 이는 임시정부에 남은 좌우합작적 성과의 흔적이다. 그 어떤 정치체제도 완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각각의 잠재력과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인간이 양쪽의 균형을 잡아야만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애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애국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제국주의 시대의 애국은 자국의 조상을 찬양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피식민지 민중들의 애국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행동은 애국일 수 없다. 인간이 과거를 기록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앞서 살던 이들의 행적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자랑만 있을 수 있는게 아니다. 부끄러움도, 잘못도, 실수도, 악행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대학살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 이유도 명쾌하다. 그런 악행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덮어야 할 내용을 다투는 오늘날의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이다.
레드컴플렉스는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역사를 두고 덮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편견이 낳을 수 있는 건 또 다른 편견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의 전환을 거쳐 우리 역사교과서가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꼼꼼히 읽어보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방공간을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서 재차 물어야 할 의무도 있다.
해방공간은 분명 혼란스러웠다. 죽음과 배신과 음모가 소용돌이 쳤고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그 씨앗들 중 열매를 맺은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뿌리 뽑혀진 이들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 지금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도 해방공간에서 시작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한 이라면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덮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게 과거를 가감 없이 가르쳐 직접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공간을 둘러싼 쟁점들을 배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넘어 오늘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로서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