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2강 후기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 <중국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박노자 교수
- 들어가며
18세기 말까지 중국은 조선인에게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자아는 중국을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 할 수 없고, 중국과 조선은 각각 다른 나라가 아닌 국민적 형제라고 하여도 비약이지 않았다.
조선 지식인에게 중국은 소우주로써 배움의 터전이며, 한편으로는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에 대한 정책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런 중국에 대한 견해는 19세기 후반 더욱 더 재미있게 변한다.
중국은 조선보다 서양기술배우기 운동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에게 중국은 외부세계와 연결 될 수 있는 통로였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책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지도들은 김옥균 같은 개화파 들에게는 지리교과서로 사용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한국 초기 신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상해에서 발행됐던 상해신보에 쓰인 글들을 토대로 기사를 게재했다.
중국이 조선 개화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조선과 외부세계의 연결을 어느 정도 선까지만 허가하여 주었고, 조선이 지나치게 외부와 연결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중국이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함으로 보이게 되면서, 김옥균과 같은 급진개화파로 하여금 중국을 견제하게 만드는 구실이 된다.
고종의 명령으로 상해에 가게 된 윤치호의 눈에 비친 중국은 더럽고 반근대적인 나라로 보였다. 윤치호는 중국을 조선근대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하는 나라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19세기 말 중국은 조선인에게 근대화의 산실이라는 생각부터 부정적 타자로서의 시각까지 다양하게 인식되었다. 각각의 인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1. 전근대로서의 중국
중국이 더럽고 비위생적인 나라라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잘 나타난 것은 바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중국에 대
한 우호적 인식 깨뜨리기를 특기로 삼은 신문이었다고 할
정도다.
독립신문은 서양에는 우호적이었지만 중국에는 아주 적대
적이었다. 중국이 조선을 유교화, 보수화 시키고 발전을 가
로 막는다는 논조의 사설을 싣기도 하고, 특히 화교들에 대
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심지어는 ‘거머리같은 것들’이
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882년 미국이 중
국노동자들의 이민을 금지시킨 법이 알려지자 조선 역시 화
교들을 강력 배척하자고 피력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보는 시각은 특히 식민지 시
대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중산층 으로 안정적 생활을 영위한
조선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의 여류작가 백
신애는 청도, 상해여행을 할 때에 본 중국인을 야만적이고
더럽다고 묘사했다.
2. 부정적 타자
개별적 중국인들은 어떻게 인식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간도 같은 경우 소작인의 70% 정도가 조선인들이었다. 중국인 지주 밑에서 조선인 소작인들은 많은 착취와 억압을 당했다.
최서해는 가난한 간도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홍명(최서해 작)’에서 악질 중국인 지주 은씨는 소작농을 못살게 구고 심지어 아내를 빼앗는데, 결국 폭압을 견디지 못한 소작농은 지주를 살인하고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중국인은 되놈으로 불리며 비양심적이고 더럽고 음흉한 모습으로 많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자’ 에도 이런 중국인 지주가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서해 같이 공산주의 계급갈등을 배우지 못한 작가들은 주로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을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랫동안 문학계의 주도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중국을 매우 부정적인 타자로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3. 근대적 희망
청나라 말기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뼈아픈 교훈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중국의 개혁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중국이 입헌군주국이 된다면, “특유의 완고함을 벗고 강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었다.
혁명이 인민의 애국심을 배양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든다는 인식은 구한말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였다. 그래서 1911년 공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후에 중국 공산당 활동이 본격화되는 20년대 같은 경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중국 공산당과 연대 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강해졌고, 이 와중에 간도에 있는 사람들(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의 문제도 계급연대 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강했다.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국을 희망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중국혁명으로 인한 폭력과 억압에서도 밝은 미래를 생각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4. 다민족, 다문화, 나아가 서양을 접촉 할 수 있는 곳
상해는 국제적인 도시로서, 조선인에게는 작은 세계, 우주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도시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상해는 국제 도시, 작은 우주, 혁명 아지트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수많은 문화 예능계 조선인에게는 매력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가졌다. 여기에 조선에서 철도를 타고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하얼빈도 위와 같은 이미지가 적용되었다.
박노자 교수
- 마치며
종합해보면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접어 들어 극단적으로 양분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조선에게 세계이자 미래였다. 상해나 하얼빈 같은 도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문명의 이미지도 같이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위에 살펴본 측면 중, 부정적 인식을 많이 계승 했다. 70년대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양상을 통해 중국에서 미래를 본다는 시선은 사라졌다고 생각되어진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하여준 강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두국가가 모두 공산주의 국가라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여건상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없었던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느끼기에 이번 강좌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강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인물(월북인사)들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였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나온 분단시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남은 3강 유럽소국관 강의도 유의미한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