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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30년 기념강좌[3강]
5.18 기념식장에 방아타령이 연주된다.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 - 오마이뉴스" 천박함을 넘었다. 우습다.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10일(월) 광주항쟁 30년 기념강좌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한홍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부터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셨다.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10일(월) 광주항쟁 30년 기념강좌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한홍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부터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셨다.
한홍구
교수
대학교 때 광주 사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눈물 흘렸다.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무차별 구타와 연행, 군대의 시민을 향한 발포.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공간에서 가장 극단적인 평화가
구현된 사건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당시 총기가 5000청이 깔렸다. 그럼에도 폭동은커녕 매점 매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머니 들이 길거리에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통행로가 막혔음에도 오히려
음식이 남았다. "나 말고 아이들 주세요." 해방 광주만 생각하면 벅차오르는 가슴은 한홍구 선생님 뿐만이 아니다.
광주 때문에 삐딱선을 탄 사람들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전단이 살포된 26일. 일부는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분들은 “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홍구 선생님은 이것을 ‘그냥 반대했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텅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그냥 놔줄 수 있냐. 전두환이 웃으면서 들어오게 놔줄 수 있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냐" 한홍구 선생님은 “80년 광주가 우리에게 준 충격. 죽음을 슬퍼할 수도, 언급할 수도, 추도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죽음마저 죽어버린 죽음의 역사. 80년대는 죽음을 끼고 산 세대다. 죽은 사람들이 내 몸 어딘가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광주에 대한 빚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독재를 향해 온몸을 던져 투항했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긴 했다.(그럼에도 용서 받을 사람은 없다. 전두환의 명언 "나, 29만원 밖에 없소") 수많은 엘리트가 노동 현장으로 갔다. 이런 수많은 헌신으로 우리나라는 참 많이 바뀌었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딱 여기까지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에 빚진 사람들을 두고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지 않았는데, 자기들만 민주화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됐나. 6월항쟁까지 하나가 되서 군사독재와 싸웠지만 영호남이 나뉘고 재야와 정치권으로 나뉘고 재야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바보들이 똑똑해 지기 시작했다.
광주와 비정규직을 잊는 고리가 여기서 생긴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자본이 대응을 달리하면서 용역, 파견, 도급. 하청,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비정규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아닌가. 이런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는가." 라고 한홍구 선생님은 말한다.
광주 때문에 삐딱선을 탄 사람들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전단이 살포된 26일. 일부는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분들은 “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홍구 선생님은 이것을 ‘그냥 반대했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텅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그냥 놔줄 수 있냐. 전두환이 웃으면서 들어오게 놔줄 수 있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냐" 한홍구 선생님은 “80년 광주가 우리에게 준 충격. 죽음을 슬퍼할 수도, 언급할 수도, 추도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죽음마저 죽어버린 죽음의 역사. 80년대는 죽음을 끼고 산 세대다. 죽은 사람들이 내 몸 어딘가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광주에 대한 빚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독재를 향해 온몸을 던져 투항했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긴 했다.(그럼에도 용서 받을 사람은 없다. 전두환의 명언 "나, 29만원 밖에 없소") 수많은 엘리트가 노동 현장으로 갔다. 이런 수많은 헌신으로 우리나라는 참 많이 바뀌었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딱 여기까지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에 빚진 사람들을 두고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지 않았는데, 자기들만 민주화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됐나. 6월항쟁까지 하나가 되서 군사독재와 싸웠지만 영호남이 나뉘고 재야와 정치권으로 나뉘고 재야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바보들이 똑똑해 지기 시작했다.
광주와 비정규직을 잊는 고리가 여기서 생긴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자본이 대응을 달리하면서 용역, 파견, 도급. 하청,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비정규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아닌가. 이런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는가." 라고 한홍구 선생님은 말한다.
한홍구 교수
계속 되는 한홍구 선생님의 날선 비판이다. "모닝 차 공장에
내려갔다. 전 노동자가 비정규직인 꿈의(?) 공장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했는데 연대를 누가 했냐. 기륭전자 아줌마들이 했다.
연대니 소통이니 했는데..이길 수 있겠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빚이다. ‘진보’에 관심있다고 하는 그 누구가 광주 사건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빛이다. 잊지 않고, 푸념으로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방아타령이 우습다. 광주는 빛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빚이다. ‘진보’에 관심있다고 하는 그 누구가 광주 사건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빛이다. 잊지 않고, 푸념으로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방아타령이 우습다. 광주는 빛이다.
(사실 쿨한 척 해도 복수하고 싶다. 투표로 복수할테다)
이 정부는 온갖 방법들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욕보이게 하네요.
역사의 진실은 이 땅에서는 아직도 바로서지 못한 듯 합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이웃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분들을 생각하면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부끄럽네요
물론 과거의 그릇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하신 분들과 현재도 이와 같은 노력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아직은 우리 역사에 대한 진실이 100% 밝혀지지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적절한 처벌 내지는 처분이 제대로 내려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멸박정부와 뉴라이트 단체 회원 등의 활동 등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지난 일이기에, 그리고 그 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기에 그들-일본에 빌붙어 우리 민중을 억악했던, 미군정에 빌붙었던 사람 등-의 행동을 욕할 수 없다는 논리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들의 변에서 인상적이었던 한마디...옛날에야 대학와서나 518을 접하고 놀라고 분개하고 그랬다면 요즘은 그런거 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 굳이 기념하고 기억해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행사해봤자 어차피 모이는 학생들도 없다는 것...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흘러간다는 전제하에 이런 시기도 있을 수 있다고 자위해 봅니다.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다지요...
리영희선생의 말처럼 작금은 강한 반동의 시기인 모양입니다. 이런 바람부는 날들 뒤에 다시 5월의 봄빛으로 찬란할 때도 올 것입니다.
근데 내가 아는 그 민수인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