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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3, 4강]
쓰레빠.
혹시 마음 한켠에서 ‘슬리퍼’로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말에 뿌리내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죠.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쓰레빠’는 ‘슬리퍼’가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해 줍니다. 두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살짝 다르기도 하구요. 이미 수십년 우리와 더부살며 의미를 형성해 온 ‘쓰레빠’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그 단어가 내포했던 것들을 함께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제 청산은 분명 미완된 현재의 문제이지만, 과도한 강박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제 잔재가 아닌 일제 콤플렉스를 청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김어준은 말합니다. “쓰레빠는 쓰레빠다.”
콤플렉스는 세상을 굴절시킵니다. 얼굴에 난 뾰루지가 불만인 사람에겐 손톱만한 것도 주먹만하게 느껴지지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도 그렇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평화적이고 순박하고 선량한 민족성을 지닌 피해자로, 제국 일본을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사악한 민족성을 지닌 가해자로 과장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식민지적 피해망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선악의 이항분리가 다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는 걸림이 됩니다.
그 식민지적 피해의식의 대표 사례로 일제의 ‘풍수단맥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조의 전통적 상징공간을 의도적으로 훼손했고, 토착신앙을 탄압한 대신 神道신앙을 강요했으며, 전통적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계획적으로 약탈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박았다는 거대한 쇠말뚝이며, 북한산(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을 통해 서울에 각인했다는 ‘대일본’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었나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일본의 치밀한 의도에서 비롯됐을까요? 혹시 일본적인 것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훼손은 아닐까요?
가령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위해 희생되었던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장춘단이 있죠. 일제는 그 바로 앞에 신마치 유곽과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각을 세우고, 장충단을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드는가 하면, 국사당을 없애고 조선신궁을 짓는 등 조선인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했구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을 꼭 일본의 악의에 의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산 지역이 조선인들에게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1882년부터 서울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본거지가 그곳이었으니까요. 이미 남산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는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는 무관하게 한 행동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수탈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나 철도 네트워크나 도로망 같은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근대적인 형태의 사회공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일제가 조선의 전통적인 풍수지리적인 공간 조형 방식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민족의 정기를 꺾으려는 방식으로 도시 계획 같은 것들이 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낭설로 여겨집니다.
경복궁 앞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의 입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복궁에 대해 과도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태종 때 창경궁이 지어져 양궁체제로 운영이 되었지요.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대원군 이전까지 기간 경복궁은 버려진 빈터에 가까웠습니다. 대원군이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을 중건할 때 경복궁에서 많은 것을 떼어와 많이 황폐해지기도 했구요. 한반도의 500년 이하의 건물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철거를 서슴지 않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지어진 지 얼마안된 경복궁의 가치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확실히 일본의 제국주의는 여타 서양의 제국주의에 비해 파괴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민족 말살 정책이나 치밀한 동화정책 같은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제국주의였잖아요. 처음에는 탈아입구를 외치며 ‘유럽인이 되자’, ‘기독교로 개종하자’ 했던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백인들을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니까 대아시아주의 같은 황인종 제국주의를 꿈꿔볼 수 있었던 거죠. 애시당초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던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같은 인종이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니까 동화정책을 펼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일제가 후발 제국주의라는 점도 서양 제국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사실상 전세계 식민지 영토 분할이 끝나가던 시기에 뒤늦은 출발을 한 셈이니, 팽창의 공간적 제약이 있었겠지요. 결국 일제는, 먼 바다로 개척해 나가는 서양의 원격제국주의와는 달리, 대륙으로 향하는 철도제국주의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렇다 보니 식민지에 대해서 완전영토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구요.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지도시를 건설할 때, 그 도시에서 차지하는 지배 민족의 인구가 0.2~0.3%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성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비중은 30%에 다다를 정도로,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땅으로 만드려고 했지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무굴제국과 비교해 봐도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영국은 기존 무굴제국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통치 비용은 최소화하면서 실리만 챙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는데, 일본은 훨씬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짧은 36년의 피지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일제의 완전영토화 전략은, 일본이 본국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취했던 정책들을 식민지 도시에도 비슷하게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의 경성 개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 도시 형성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일본의 도시들을 보면 일본식 전통과 서양식 현대가 어색한 듯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죠. 실제로 이 전통과 현대의 알력이 근대 도시 형성 과정에서도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조약개정․문명개화․부국강병 등 서양화의 경향과 전통적 공간 구성 요소나 통제방식을 재동원해 변용하는 일본화의 경향이 공존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원과 역량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급속한 개혁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만큼, 전통의 것들을 어느 정도 이용하면서 생활 인프라와 같은 것들은 시민의 자발적 역할에 맡기고 나머지 자원을 군국주의 노선 강화에 이용한 것입니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군사 쪽에 쏟았다고 하니, 사회민주적 후진성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겠죠.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쇼케이스 격으로 만들어진 오늘날 동경의 긴자 정도만 일단 시구개정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래서 도시 계획은 일본 본토보다도 타이페이가 훨씬 더 앞서 갑니다. 경성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비용 문제 때문에 제대로 초기 도시 계획을 하기보다는 간선도로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1912년부터 계획된 시구개정사업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종로․을지로․충무로 등지의 격자형 도로가 바로 이 시구개정사업의 결과물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이 강의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는지 묻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을 개발해 온 방식은,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위로부터 디자인된 플랜을 가지고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참여나 지역 커뮤니티 사람들의 노하우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으로 이뤄진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북 뉴타운 같은 계획은 강남 개발보다 훨씬 더 나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북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장소성, 역사성을 다 사장시켜버리는 것이잖아요. 사실 그런 것들이 역사도시가 갖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거든요. 서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지층들의 기억, 장소성이 녹아들어 있는 것들이 색바랜 도시의 매력인데, 그런 것들을 그냥 말끔하게 고층빌딩 세워서 없애버리는 방식이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해온 방식이었죠.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제약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 운영의 노하우 같은 것들을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다 폐기처분하면서 시작된 정신적인 아노미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서구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패턴과 양식을 빌려왔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진 국적 없는 도시가 돼 버린 거잖아요. 스스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을 찾아내는 눈을 갖는 것. 그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좀 천천히 가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는 속도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한 도시잖아요. 조금 천천히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잠재력 이런 것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형편없는 도시라 얘기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공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거든요. 롯폰기힐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수백회 이상 주민들과 면담을 하면서 계획을 수정하고 협상하고 이런 테이블들이 마련이 되고요. 그냥 마스터플랜 만들어서 확 밀어버리는 방식의 진행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도시가, 공간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뭔가에 대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재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꾸고, 개발하는 관행이나 제도나 문화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인 거죠.”
이상 광운대학교 김백영 교수님의 강의 후기였습니다.
개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네요.
(참, 어제 뒷정리 같이 끝내고 가야 하는데 먼저 가서 죄송해요.너무 추워서..ㅜㅜ 담엔 꼭 끝까지 정리하고 가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