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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1, 2강]
1강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문명과 도시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잉여생산은 인구의 축적을 낳았으며 드디어 "도시"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오로지 신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 곳에 신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농사일에서 자유로우며 신을 위한 의식에 치중했던 이들의 생활과 문화는 농촌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했다. 도시에 권력(신성권력:사제집단+세속권력:왕)이 집중되면서 이제 도시는 자신의 공간에 권력적 요소들을 드러내게 된다. 권력자들은 이런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사람들에게 도시가 선택받은 특권적인 장소임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고자 했다.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서울은 '새벌-서나벌-셔블-서울'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단어로 순 한글말이며 "가장 신성한 땅"이란 뜻이다. ("새벌"의 "새"는 새로움, 동쪽을 뜻하고 "벌"은 땅을 의미함.)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서울)을 택한 것은 개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구 특권 세력의 해체와 새 나라를 위한 건국이념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정도전은 이런 서울을 설계한 인물로, 그는 자신의 이상이던 유교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주자성리학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전조후시前朝後市 : 궁궐의 전면에 관청을, 후면에 시전을 배치
제후칠궤諸侯七軌 : 제후의 길(광화문)은 마차 7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길로 함.
조선 초 한양(서울)은 새로운 도시로서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였다고 한다. 과거제를 거쳐 각 지역에서 올라온 신진사대부들을 통해 각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한양(서울)만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것이다. 세종대왕 시기의 새로운 발명과 창조가 가능했던 것도 조선 초기 수도 한양의 문화에 영향을 입은 것이었을 것이다.(2010년 서울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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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참여연대에서 두번째 수업이 있었다.
이번 강의도 전우용님의 열강으로 흥미진진한 수업이었다.
2강 서울, 근대로 향하다
사람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념이나 가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지 모르고, 혹자는 지식체계의 변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크고 중요한 삶의 변화 요인은 바로 "자연"이다. 기후변화같은 자연문제는 앞으로도 우리 미래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역시 17세기 소빙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 대륙에 소빙기가 찾아오자 기상 이변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기근, 질병이 만연하게 되고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국가-명나라, 청나라, 조선, 일본-들이 자국의 문제를 외부를 통해 해소하는 방식을 택하게 만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울은 기능과 모습이 크게 파괴된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은 끊이질 않았다. 많은 인구 감소로 양민의 수가 줄어들자 이를 늘리기 위해 군공과 면천을 실시하는 등 폐쇄적이던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 후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서울의 재건을 위해 궁궐 복구와 성곽 수리 및 군사 시설 정비가 시작된다. 사회 전체가 이전의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자 실학처럼 새로운 학문이 등장해 당시 사회 모습을 다루고자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 농업생산력 및 의학의 발전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울도 늘어난 인구와 함께 확장하기 시작한다.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로 진입하며 서울 교외 지역 확장도 일어났다.
특히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한국전쟁 직후이고 또 한 번은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이다.
도시공간이 계속 팽창하면서 18세기 한양(서울)은 근대적 양상을 띄게 된다. 근대적인 도시 문제(주택문제, 일자리문제, 환경문제, 범죄 등)들도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일본 우파들이 말하는 "일제침략이 조선의 근대성에 이바지했다"는 주장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도시화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이미 일제 침략 전인 18세기에 근대적인 모습이 서울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당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자 비리 투성이었던 노론을 넘어서기 위해 더 아래 신분인 일반 백성들과 손잡기를 원했고 이는 민본적 절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은 도시를 민본적 절대주의가 드러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시민공원과 상설시장의 등장은 백성을 위한 고종의 의도가 잘 드러난 도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로를 관통하는 동서축을 강조한 "황도건설"은 이 길을 주로 이용하게 될 국민에 대한 배려이자 근대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주독립, 전제황권을 도시 공간 위에 표시함으로서 고종의 정치적 의도를 잘 드러내며 조선시대 도시근대화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종로를 중심축으로 삼았던 것은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나마 종로가 일본인 중심의 명동에 맞서 조선인 상권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질문과 답변을 올려본다.
"서울을 주도할 가치와 신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시는 그 도시 사람들을 닮기 마련이다.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추악한 도시 6위에 뽑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울 시민도 가장 추악한 시민 6위라는 소리다. 도시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권력과 돈이 일차적으로 움직이는 곳이 바로 도시개발, 도시주권이다. 한강이 파괴되어도 집 값이 올라가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많으면 결국 그런 식으로 도시 모습은 흘러가게 된다. 무엇보다 서울 시민들의 모습에 따라 앞으로의 서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욕망을 가슴에 품고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서울은 영원히 지금과 같은 수 밖에 없다는 전우용 선생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많이 남습니다.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강의었지 않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