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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7강]
어느덧 7강입니다. 남은 8강이 조별 시놉시스 발표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료를 토대로 기존 역사드라마를 재고찰하는 것은 마지막인 셈입니다.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주은경 아카데미 부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 소크라테스는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성찰케 하는 방법으로 문답법을 썼다 합니다, 상대방의 대답이 막힐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거죠. 그리고는 이미 떡실신한 상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저에게는 이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의가 소크라테스의 물음보다도 곤혹스러운 질문 공세였습니다. 처음 <선덕여왕> 강의를 들었을 때의 공포스러운 좌절감을 기억합니다. 6~7세기 한반도를 종횡무진한 전덕재 선생님의 강의에 정신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습니다. 밀실에서도 미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강의 후기를 쓰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희미한 기억 조각들을 어렵게 반추하며 하나씩 꿰는 과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 속에 작게나마 복원된 과거상를 보며 조금은 이 복잡한 역사의 미로를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제중원>을 중심으로 개화기 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7강도 저의 무지를 통렬하게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괴롭고 즐거운 미로를 알려주신 분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이 던져주신 아리아드네의 실을 조심스럽게 쥐어 봅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바짝 따라 오세요. 출발~
▲ 주진오 교수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서양 병원, 제중원. 드라마에서 그리는 제중원은 명의(名醫) 알렌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그려집니다. 알렌은 1858년 미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 들렀다가, 이듬해인 1884년 9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짧은 의학 경력, 과연 알렌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훌륭한 의사였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그는 임상경험이 부족해 치료 중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합니다. 아무튼 알렌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일하다,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을 구합니다. 여기서 알렌은 고종의 신뢰를 크게 얻습니다. 고종의 어의가 되는가 하면,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될 정도로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제중원 설립 제안을 하게 되지요. 이 제안에 고종은 알렌에게 홍영식의 집을 줘 제중원을 설립하게 합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을 주도해 죽은 인물이죠. 지금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그 터가 있는 홍영식의 집을 조정에서 몰수했다가 넘긴 것입니다.
1882년에 폐지된 전통적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의 후신격인 제중원은 1885년 4월에 설립됩니다. 설립 초기 잠깐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제중원’으로 부표됩니다. ‘부표’란 국왕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수정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제중원 설립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넉달.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척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제중원을 마치 알렌이 만든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고종은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감리교를 통해 추진되던 방식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리교는 이후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제중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시 복잡했던 한반도 주변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 열강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니 갑신정변이니 하는 사건들에 시달린 고종에게, 미국은 그나마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로 비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나 청을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나라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영토보다는 선교나 무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을 통해 미국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알렌은 1901년부터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며 친한적인 태도를 보여 루즈벨트와 갈등하다 해임됩니다. 그런 고종의 기대 때문일까요? 드라마는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간 나라인데도 말이죠. 알렌이 친한적인 태도를 보인 본심 역시 조선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빼앗길 이권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악하게 미국은 선하게 그려놓은 드라마의 선악이분법적 민족주의는 오류라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일본 역시 개화기에 가이세(카이로세) 등 의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미국의 역할만 지나치게 부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중원 설립 후 그 안에서 알렌과 갈등을 빚게 되는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헤론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가 하면,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알렌보다 일찍 북장로회를 통해 조선에 파견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한발 늦어 1885년 6월에야 조선에 들어옵니다. 알렌과 헤론은 물과 기름 같이 갈등했다고 합니다. “알렌은 의료 사업이 곧 선교 사업이라 직접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의료 활동에 무게를 두었지만 헤론의 경우에는 의료는 선교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헤론 편을 들면서” 알렌은 늘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알렌은, 1887년 조선 정부가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며 알렌을 참찬관으로 임명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를 헤론이 대신하다 1890년 운명합니다. 그리고 알렌은 1889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헤론 사후 반년간 제중원에 대한 책임을 다시 맡지요.
아무튼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알렌이 제중원의 1대 원장인 것은 아닙니다. 알렌은 1대 원장은커녕, 1887년까지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제중원은 엄연한 국가 기구였고 운영권 역시 국가에 있었습니다.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에 책임을 맡을 무렵에 가서야,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운영권이 북장로회선교부에 이관됩니다. 그리고 에비슨은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기증한 재원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합니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세’는 이 세브란스의 첫음을 딴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소 연합병원의 건설은 물론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건축가 친구인 고든에게 부탁해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의 설계도면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요청으로 1900년 4월말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의 강연을 들은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 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하면서 병원 건축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록 1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평양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브란스가 금액 전부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무마되었다. 부지 선정 문제로 인해 지연되던 병원 건립계획은 부지 매입을 위한 세브란스의 추가 기금으로 인해 속도가 붙었고,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에 병원 부지 매입이 이루어졌다. 조선정부의 건축허가 불허, 건축자재 값 폭등 등 여러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04년 9월 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불렀고, '기념'을 생략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황정이 제중원 설립과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박서양은 1885년 9월 생으로 제중원이 설립된 해에 태어난 인물이라, 황정에 대한 설정은 백정 부분만 따온 것일 뿐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춘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직접 몇 번에 걸친 왕진을 통해 자신을 성실하게 치료해 준 것에 감명을 받아 개신교인이 되었다. (중략) 여러모로 에비슨과 인연이 있었던 박성춘은 그의 초대로 아들인 박서양의 혼인식에 참석한 에비슨에게 자식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박서양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에 데려왔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및 잡무를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모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에게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1900년 8월 30일 정규과정으로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7명의 의사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직후 화학을 맡아 강의를 하다가 다음에 해부학을 가르쳤고, 외과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학교와 후진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918년까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만주 용정의 국자가局子街에 구세의원을 개업하였다.”
▲ 질의 응답 시간
강의 후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혹시 근대병원의 설립에 관해 더욱 구체적인 사항이 알고 싶으시다면,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사이트 cp0804.culturecontent.com에 들어가 자료들을 살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후기에 실린 큰따옴표 안의 인용문들은 모두 그곳의 글들을 붙여넣은 것입니다. 더불어 이 주제와 관련해 최근 <프레시안>에서도 황상익 서울대 교수님의 연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료와 함께 서술된 재미있는 연재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드라마 <제중원>을 중심으로 개화기 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7강도 저의 무지를 통렬하게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괴롭고 즐거운 미로를 알려주신 분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이 던져주신 아리아드네의 실을 조심스럽게 쥐어 봅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바짝 따라 오세요. 출발~
▲ 주진오 교수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서양 병원, 제중원. 드라마에서 그리는 제중원은 명의(名醫) 알렌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그려집니다. 알렌은 1858년 미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 들렀다가, 이듬해인 1884년 9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짧은 의학 경력, 과연 알렌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훌륭한 의사였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그는 임상경험이 부족해 치료 중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합니다. 아무튼 알렌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일하다,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을 구합니다. 여기서 알렌은 고종의 신뢰를 크게 얻습니다. 고종의 어의가 되는가 하면,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될 정도로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제중원 설립 제안을 하게 되지요. 이 제안에 고종은 알렌에게 홍영식의 집을 줘 제중원을 설립하게 합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을 주도해 죽은 인물이죠. 지금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그 터가 있는 홍영식의 집을 조정에서 몰수했다가 넘긴 것입니다.
1882년에 폐지된 전통적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의 후신격인 제중원은 1885년 4월에 설립됩니다. 설립 초기 잠깐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제중원’으로 부표됩니다. ‘부표’란 국왕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수정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제중원 설립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넉달.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척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제중원을 마치 알렌이 만든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고종은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감리교를 통해 추진되던 방식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리교는 이후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제중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시 복잡했던 한반도 주변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 열강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니 갑신정변이니 하는 사건들에 시달린 고종에게, 미국은 그나마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로 비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나 청을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나라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영토보다는 선교나 무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을 통해 미국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알렌은 1901년부터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며 친한적인 태도를 보여 루즈벨트와 갈등하다 해임됩니다. 그런 고종의 기대 때문일까요? 드라마는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간 나라인데도 말이죠. 알렌이 친한적인 태도를 보인 본심 역시 조선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빼앗길 이권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악하게 미국은 선하게 그려놓은 드라마의 선악이분법적 민족주의는 오류라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일본 역시 개화기에 가이세(카이로세) 등 의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미국의 역할만 지나치게 부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중원 설립 후 그 안에서 알렌과 갈등을 빚게 되는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헤론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가 하면,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알렌보다 일찍 북장로회를 통해 조선에 파견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한발 늦어 1885년 6월에야 조선에 들어옵니다. 알렌과 헤론은 물과 기름 같이 갈등했다고 합니다. “알렌은 의료 사업이 곧 선교 사업이라 직접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의료 활동에 무게를 두었지만 헤론의 경우에는 의료는 선교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헤론 편을 들면서” 알렌은 늘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알렌은, 1887년 조선 정부가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며 알렌을 참찬관으로 임명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를 헤론이 대신하다 1890년 운명합니다. 그리고 알렌은 1889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헤론 사후 반년간 제중원에 대한 책임을 다시 맡지요.
아무튼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알렌이 제중원의 1대 원장인 것은 아닙니다. 알렌은 1대 원장은커녕, 1887년까지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제중원은 엄연한 국가 기구였고 운영권 역시 국가에 있었습니다.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에 책임을 맡을 무렵에 가서야,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운영권이 북장로회선교부에 이관됩니다. 그리고 에비슨은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기증한 재원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합니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세’는 이 세브란스의 첫음을 딴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소 연합병원의 건설은 물론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건축가 친구인 고든에게 부탁해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의 설계도면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요청으로 1900년 4월말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의 강연을 들은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 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하면서 병원 건축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록 1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평양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브란스가 금액 전부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무마되었다. 부지 선정 문제로 인해 지연되던 병원 건립계획은 부지 매입을 위한 세브란스의 추가 기금으로 인해 속도가 붙었고,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에 병원 부지 매입이 이루어졌다. 조선정부의 건축허가 불허, 건축자재 값 폭등 등 여러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04년 9월 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불렀고, '기념'을 생략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황정이 제중원 설립과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박서양은 1885년 9월 생으로 제중원이 설립된 해에 태어난 인물이라, 황정에 대한 설정은 백정 부분만 따온 것일 뿐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춘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직접 몇 번에 걸친 왕진을 통해 자신을 성실하게 치료해 준 것에 감명을 받아 개신교인이 되었다. (중략) 여러모로 에비슨과 인연이 있었던 박성춘은 그의 초대로 아들인 박서양의 혼인식에 참석한 에비슨에게 자식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박서양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에 데려왔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및 잡무를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모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에게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1900년 8월 30일 정규과정으로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7명의 의사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직후 화학을 맡아 강의를 하다가 다음에 해부학을 가르쳤고, 외과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학교와 후진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918년까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만주 용정의 국자가局子街에 구세의원을 개업하였다.”
▲ 질의 응답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