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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6강]
▲ 정창권 교수
교수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2세대라 칭했습니다.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나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그러한 여성관이 녹아 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여성사를 ‘남성에 의한 종속사’로 보곤 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러한 역사의 예외지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지위가 아닌 일상 생활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반도 역사상 여성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16세기까지만 해도 매맞는 아내 얘기는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매맞는 남편이야기만 나오지요. 조선 중종 때는 ‘이러다 조선 남자 씨가 마르겠다’는 (다소 엄살섞인) 우려도 있었다 하네요. 이외에 처가살이라던지, 족보에 남녀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는 거라던지, 자녀 간 공평한 재산분배 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런 흐름이 뒤바뀌어 남녀 사이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불과 2~300년 사이의 일입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점점 악화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조선 말,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한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만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여성사 암흑기’에 드물게 성공한 사례에 만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만덕에 대한 사료로는 체제공의 <만덕전>이나, 심노숭의 <계섬전>, 정약용이나 김정희의 기록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로는 충분치는 않아 만덕의 삶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저 성긴 정보로 만덕의 삶을 추리해 볼 수 있을 뿐이지요. 때문에 곳곳에서 반대되는 상상과 해석들이 충돌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겠지요.
탐라의 양가집 딸인 김만덕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한 기녀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조금 자라자 그 기녀가 기안(기녀 명부)에 올려버려 기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녀를 유곽의 여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후대에 와서 왜곡된 이미지라 합니다. 기녀는 기생과는 다른 관노비입니다. 특히 제주에서는 기녀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 나았는데, 남편을 잃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유녀(떠돌이 여성)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만덕이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서 스스로 기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기녀가 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수동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수님의 해석과는 반대로 체제공은 <만덕전>에서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노릇을 할망정 스스로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나이 20여 세가 되자, 만덕이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목사가 가긍히 여겨 기안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라고 썼습니다. 당시 기녀들은 나이 50세가 되거나 다른 사람을 사서(대비속신) 기녀 신분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정해서 양민이 될 정도면 재주가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양민이 된 만덕은 결혼은 하지 않고 머슴을 부려 장사를 시작합니다. 아마 포구에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말총이나 우황, 미역, 전복 귤 등을 육지에 내다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인 곡식, 소금, 철, 비단 등을 사 들여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장사 수완이 좋은지 어느새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죠. 그녀는 육지와 제주 사이의 시세 차이를 이용한 방식으로 이문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제주에서의 곡식 100석은 육지에서의 1000석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 시절 제주에는 기근이 주기적으로 왔다고 하는데요, 만덕이 장사를 시작한 20대부터 기부를 한 50대에 이르는 사이에도 분명 기근은 몇차례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덕은 그 사이에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죠. 과연 그 치부 과정이 정당했을까요? 혹 인심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심노숭은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났는데,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마저 빼앗았다.’라고 썼습니다. 만덕에 대한 유일한 악평이지만, 허투루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795년, 만덕의 나이 56세 때 탐라에 큰 흉년이 듭니다. 당시 제주 인구가 47,735명이었는데, 그 1/3인 17,963명이 굶어죽을 정도의 재앙이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곡식을 실은 배를 보내도 제주 앞바다의 거센 물살에 전복돼 막막한 상황. 이에 만덕이 곡식(일설에 의하면 500석)을 사들여 1/10은 자기 일가 친척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아에 바쳐 가난을 구제합니다. 만덕이 구휼에 나선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나도록 제주 목사 이우현은 조정에 보고할 생각을 않습니다. 당시 만덕 외에도 고한록이라는 양반이 구휼에 나서, 그에 대한 보고는 조정에 올라가 포상을 받았는데 말이죠. 이에 백성들이 성화하자 그제야 이우현은 보고를 올리고, 정조는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소원이 또 가관입니다.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한번 서울에 가서 임금님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당시 제주민에게는 출륙금지령이 내려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열악한 제주의 환경에 육지로 옮겨오려는 이들이 많아, 인조가 1629년에 명한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의 출륙은 더욱 엄금해서, 뭍의 남자와 혼인해 그곳으로 옮겨가 사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참 특이한 소원이다 싶지만, 따져보면 돈도 벌 만큼 번 사람에게 남은 소원이란 게 그런 굴레를 벗고픈 욕망 외에 뭐 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애초부터 이런 소원을 성취할 흑심을 품고 구휼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모난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민가의 여자가 궁궐 구경하고 싶다는 바람을 꺼낸 것 자체가 그 배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만덕은 소원을 이뤄 한양에 올라오지만, 처음에는 돌봐주는 이가 없어 힘들게 생활해야 했습니다. 왕이 명한 것임에도 참 허술하게 일처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체제공이 정조에게 아뢰어 비변사에 머물고 선혜청에서 식량을 대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58세에는 금강산 구경까지 마치고 한양에 한번 더 들렀다가 제주로 돌아옵니다. 따지고보면 굉장히 먼길인데 어떻게 이동했을까요? 걷더라도 힘든 길이지만, 가마나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 정도 거리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나이는 거의 환갑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 고난 다 감내하고 다녀올 만큼 정력적인 여인이었나 봅니다. 명도 굉장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요. 이후 만덕이 소원을 성취하고 죽기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제주 성안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만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시대에 결혼은 필수적이어서, 과년한 자식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부모가 처벌받을 정도였는데도 말이죠. 아마 기녀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자들이 꺼리거나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도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외로운 삶입니다만, 소원을 다 이뤘으니 지루할 틈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를 나누어 줄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