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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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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제 2강 :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강연자 : 전덕재 /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들어가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를 예로 들자면,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겠네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런 식으로 말이죠. 고려시대의 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사를, 성골들이 왕위를 이어간 ‘상대’, 태종무열왕(김춘추)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중대’, 그리고 나머지 기간인 ‘하대’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고려시대의 승려인 일연은 상고(혁거세왕~지증왕), 중고(법흥왕~진덕여왕), 하고(무열왕~경순왕)로 신라 시대를 나눕니다.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택한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신라의 전성기라 보았던 거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두 번째 강의는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일연이 말한 불교식 왕명 시대, 즉 ‘중고’ 시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강의를 맡으신 분은 경주대 문화재학부의 전덕재 교수님. 멀리서 오셨음에도 지친 기색없이 열정적인 강의로, 수강생들의 혼과 진을 완전히 빼놓으셨습니다.
전덕재 교수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법흥왕
불교식 왕명 시대는 왕이 불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시기입니다. 불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 나타난 것이죠. 통일신라 시대 들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 불교식 왕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고시대의 첫 왕인 태종무열왕처럼 말이죠.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첫 인물은 법흥왕(法興)입니다. 이름부터 불법(佛法)을 일으킨 왕이라는 뜻이죠. 527년 불교를 공인한 데서 비롯된 왕명으로 추정됩니다.
전륜성왕을 꿈꿨던 진흥왕
법흥왕의 뒤를 이은 이는 진흥왕입니다. 영토를 크게 넓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한 왕이죠. 그의 본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인데요, 이는 사미(승려)를 뜻한다고 합니다. 발음부터 비슷하죠.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요, 각각의 이름을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훗날의 진지왕)으로 지었습니다. 사륜은 ‘쇠륜’이란 뜻으로, 달리 말하면 철륜(鐵輪)입니다. 동륜과 철륜이 있으니, 금륜(金輪)과 은륜(銀輪)도 있겠죠? 이 금․은․동․철륜은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왕을 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칭이라 하네요. 아들들을 동․철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금륜왕으로 자처하여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진흥왕의 의중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
진흥왕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왕이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전합니다.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물러나게 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김용수)은 왕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용춘의 아들은 훗날 왕위에 오르는데요, 그가 바로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입니다.
자신의 핏줄을 신성화한 진평왕 그리고 폐위된 진지왕의 뒤를 잇는 것은 그의 조카인 진평왕입니다. 스스로를 석가(‘석가모니’란 뜻이 아닙니다. 크샤트리아 계급의 한 종족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도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요.) 이름을 따 백정(白靜)이라 하고, 왕비 이름도 석가 어머니 이름을 딴 마야부인이라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동생 이름도 석가모니의 삼촌 이름을 따랐지요. 집안 사람들 이름을 이렇게 바꾼 것은,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모방하여 스스로의 골품을 성화(聖化)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진평왕대에 들어서 자기 핏줄이 더 신성한 골족, 즉 성골이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죠. 둘다 진흥왕의 자손임에도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은 성골이고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골이잖아요. 즉 진지왕대까지는 없었던 성골․진골 구분이 진평왕대에 들어서 생긴 것입니다. 진평왕은 즉위했을 때(579년)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를 왕위에 앉힌 나이 많은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겠죠. 상대등에 올랐던 노리부(弩里夫)나 수을부(首乙夫)같은 진골 귀족들 말이죠. 자연히 왕권은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진평왕은 집권 후반에, 진지왕의 폐위에 앞장섰던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애씁니다. 앞서 언급한 김용춘 |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을 요직에 적극 등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는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김춘추는 물론이고 김유신 역시 전통적인 진골귀족으로부터 괄시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어머니인 만명과 결혼할 때 수을부가 강력히 반대했거든요. 수을부는 만명의 아버지로서, 금관가야계 왕족의 후예인 김서현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겠죠. 아무튼 이 신귀족세력은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등, 진평왕의 후원을 받아 가문간에 서로 연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579년부터 632년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랜 기간 제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석가와 마야부인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었을텐데요. 기껏 자기 핏줄을 성골이라 해놨더니 정작 핏줄을 이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고, 선화공주는 서동요의 주인공이죠. 세 공주의 생몰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는 덕만이 맏이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진평왕이 후원한 김용춘․김서현의 강력한 지지로 덕만공주가 여자임에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631년 칠숙과 석품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그렇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이란 왕호 역시 불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꿈꿨던 전륜성왕의식을 계승하여 왕호를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으로 분한 이요원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만, 실제 선덕여왕은 마흔이 다 되어서야 즉위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적은 나이가 아니지요. 진평왕이 너무 오래 제위했기 때문입니다. 진평왕대에 이어서 선덕여왕의 통치기에도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상대등에도 오른 바 있는 알천이나 비담 같은 인물이 구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하지만 당시 여제동맹의 대외적 압박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신라가 백제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긴 후, 김춘추는 고구려․일본 등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하다가, 결국 648년 당나라로 가서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유신 역시 대야성 전투 이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쟁을 수행하죠. 결국 둘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 이러한 신귀족의 성장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647년) 결국 김유신에게 진압당합니다. 이후 신귀족은 승만공주(진덕여왕)를 왕위에 앉히고 실질적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전덕재 교수
최초의 여자인 왕. 선덕은 남성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앞서 언급한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당황제가 신라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네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이런 부정적 시각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선덕은 자신이 지혜를 발휘한 세가지 일, 즉 지기삼사(知幾三事)와 같은 설화를 지어 퍼뜨렸습니다. 여자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능력을 보여야 했으니까요. 선덕은 유언으로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도리천은 불교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33천(天)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합니다. 그리고 선덕의 그 유언은 도리천에 환생한 후 다시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얘기한 거라고 해석된다 합니다. 누구보다 남성이기를 갈망한 선덕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후대에 들어서도 오랫동안 선덕은 ‘여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령 통일신라의 헌안왕은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하였구요, 김부식은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겠죠. 그들은 심지어 선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낮춰 부를 정도 였습니다.
선덕이 집권한 기간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이 북쪽과 서쪽에서 압박해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6년 치세 기간 전쟁으로 시달리느라 정치 개혁에 힘을 쏟을 여력은 없었겠지요. 오늘날 선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극 후원하고 등용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와 김춘추의 결혼을 주선한 것도 선덕여왕이었죠. 유명한 오줌싸는 꿈 일화입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간 연대에 선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은 김춘추와 김유신 역할만 강조돼 정작 선덕은 조력자 역할로 낮춰졌다며 새로운 평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재능을 간파하고 중용한 선덕의 용인술이야 말로, 허무맹랑한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지어낼 필요가 없을 만큼 멋진 지기일사(知幾一事)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