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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제 1강
삼월의 바람 속에 시작된 돈의 인문학 강좌
지난 3월 9일 봄을 기다리는 비가 조금씩 내리던 날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돈의 인문학> 첫 번째 강의가 열렸습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총총히 오신 수강생 분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 들어오셨고 첫 번째 강의를 해주실 김찬호 교수님도 일찌감치 오셔서 강의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혜인님의 <삼월의 바람 속에>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던 그날의 날씨에 걸맞게 시린 환경에서도 희망을 기다리는 영롱한 싯구들이 수강생들의 마음에 녹아들며 그렇게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인문학과 돈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주제입니다. 김찬호 교수는 경쟁사회에서 영원한 화두가 되는 돈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인문학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연결점을 찾을 수 있는지 실마리가 될 이야기들을 몇 가지 꺼내었습니다. 어느 한 초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더니 절반 이상이 ‘부자’라는 대답을 했다는 조사결과, 이주 여성과 결혼한 남편에게 무심코 ‘얼마주고 데려왔느냐’고 묻는 질문, 너무나 흔해진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 돈방석에 앉으라는 축복아닌 축복을 주는 음식점 등의 예를 통해 현재 한국사회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돈의 물결에 침식되어 있는지를 새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찬호 교수는 "돈이 객관적 실체로서 사회를 규정하지 않으며 우리의 의미 부여방식에 따라 돈의 작용방식이 결정지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 번째 강의는 수강생 모두가 자신의 인생과 돈과의 관계를 물어보는 질문지에 답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자신의 생각을 성찰하고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만화경이 따로없네, 돈에 얽힌 울고 웃는 이야기들
김찬호 교수가 준비한 문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돈에 얽힌 잊지 못할 기억(행복,불행했던 경험)
2.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일이 있다면?
3.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과 한국사회 그리고 돈
4. 돈으로 그려보는 행복곡선
5. 내게 돈은 ________________이다.
수강생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고 5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한사람씩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직업, 출신만큼 수많은 주제의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장학금, 첫월급, 차압, 착취, 장기주택자금대출, 회계, 모자랐던 생활비로 벌어진 에피소드 등이 하나씩 하나씩 강의실을 채워나갔습니다. 그중 몇 가지 수강생들을 웃기고 울린 몇가지 인상적인 말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돈은 남편이다. 관리하기 힘들면서 없으면 섭섭하다.
▷4년 반 일하면서 돈은 모아도 불행했지만 퇴사하고 난 후 행복지수가 최고가 되었다.
▷인도 여행을 할 때 인력거를 500원 내고 4km를 갔는데 기사가 바가지 250원을 씌우자 깎기 위해 싸우면서도 ‘왜 그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에서 천원주고 산 복권이 당첨되어서 세금 빼고 삼만 칠천원 받았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한턱 쏘고 십만원 냈다. 예전에는 옷 주머니에 있던 백만원 짜리 수표를 빼지 않고 세탁기에 넣은 적이 있다.
▷돈이 한쪽으로 몰려있다는 느낌이 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라 안타깝다. 돈은 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으면 위험하고 너무 적으면 갈증난다.
▷누워만 있어도, 숨을 쉬기만 해도 돈이 들어간다. ‘돈이 없으면 누워있을 수 도 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집세. 생활비, 학비를 대학생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도움을 받고 있다. 갈등의 귀결은 항상 돈이다. 돈이 단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부모 ․ 자식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괴롭다.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이다
다들 느끼셨겠지만, 읽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재미있는 사연도 있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현실이 너무나 묵직하게 느껴져 마음 한쪽이 무거워지는 말도 있었습니다.
김찬호교수는 돈이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처럼 이것은 인류가 발명한 시스템 중에 가장 희한한 것일 지도 모른다고 정리했습니다.
처음 만난 타인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술회하고 타인의 개인사에 긴밀히 귀기울인 시간은 바쁜 일상에서 쉽게 가지지 못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이다>라는 말처럼 때론 황당하게, 때론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돈에 대해서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의 한 조각이었음을, 그리고 그 달콤 쌉싸름한 조각들이 모여 대한민국이라는 큰 만화경을 이루고 있다는 긴 여운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찬호 교수가 함께 읽기를 권한 시를 띄웁니다.
김광림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던져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하게 벗어던진
이 조용한 허탈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창구를 찾아들지만
추심할 곳이 없는 현세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