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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과 함께 읽는 칼 폴라니 1] 인간과 시장
* 아래 기사는 7월 9일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시작된 홍기빈 선생님의 폴라니 강좌에 대한 프레시안의 정리기사입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나 케인스 아류가 아니다"
[홍기빈과 함께 읽는 칼 폴라니①] 인간과 시장
지난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본격화된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이 한국에 가져다준 충격은 매우 컸다. 당장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컸지만, 못지 않게 지적, 심리적 충격도 컸다. '승승장구하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로의 편입 만이 한국의 유일한 살 길'이라는 우파의 주장에 좌파 역시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표상인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지난해 한국 지식사회에서는 헝가리 출신의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1886~1964)가 주목받게 됐다. 1990년대 폴라니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던 홍기빈 박사(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솔직히 대학원 논문을 쓸 때만 해도 한국에서 폴라니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홍 박사는 최근 폴라니의 대표작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길 펴냄)을 번역했다.
어쨌든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평가되는 현 위기에서 마르크스도 아닌, 케인스도 아닌, 폴라니가 신자유주의와 다른 경제질서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홍기빈 박사는 최근 폴라니 열풍에 대해 "폴라니가 하지 않은 얘기를 씌워서 비판하거나 환상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홍 박사는 지난 9일부터 4회에 걸쳐 참여사회연구소 주최로 '위기의 시대에 읽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강연을 갖는다. 홍 박사의 강연을 요약, 발췌해 게재한다. <편집자>
▲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길 펴냄). ⓒ프레시안 |
크게 3꼭지로 나눠서 얘기하려고 한다. 먼저 폴라니가 다른 경제사상가들과 어떤 다른가. 둘째, 인류역사에서 시장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셋째, 산업혁명과 기계제의 문제.
1. 케인스, 하이에크, 마르크스 그리고 폴라니
내가 지난 20년 동안 가장 크게 상처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그래서 대안이 뭐냐?'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끄떡없다. '당신들은 대안 있냐'고 물으면 누구도 대답하기 힘들다. 우선 대안담론의 허구성과 연결해서 얘기하고 싶다.
케인스, 하이에크, 마르크스. 이 세 사람과 폴라니의 대립점은 폴라니는 시장경제 자체를 허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세 사람은 시장경제에 대한 입장은 각기 달라도 시장경제 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경제라고 하는 틀로 사유하지 말라. 지금 살고 있는 사회도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존재하는 시장경제를 도덕성과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차원 두 가지로 판단할 때 완벽하다고 보는 게 하이에크다. 도덕성도 용납될 수 없고 합리성도 끝내 위기와 공황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시장경제를 전면 부정하는 건 마르크스다. 시장경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지 않고 합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어서 법령이나 정책으로 조정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케인스다. 시장경제의 틀로 보면 완전 긍정(하이에크), 완전 부정(마르크스), 조건부 긍정/부정(케이즈) 세 가지 밖에 없다.
앞의 얘기로 돌아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사상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는 '대안이 뭐냐?'는 질문이었다.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영국 대처 수상이다. 1976년 IMF 위기에 빠지고 79년 집권한 대처 수상은 영국의 복지자본주의를 싹 다 뜯어고쳐야 한다면서 신자유주의를 강행했다. 문제제기하면 "신자유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이 굉장히 천박하고 경박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시장경제 입장은 3가지 밖에 없다. 70년대에는 완전 부정/긍정(케인스주의)이 한계에 부딪혔다. 90년대 초 현실에서 존재하는 공산주의가 무너졌다. 따라서 대안이 뭐냐는 게 정치가가 만들어진 경박한 조어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역사철학이 담긴 말이다.
인류가 실험한 2개의 옵션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른 제안이 뭐냐. 이걸 이론으로 정교화 한 게 후쿠야마다. 다른 옵션은 끝났다. 그래서 시장경제를 회피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요지였다. 프리드만도 '황금구속복'의 착용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주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체제를 반대하고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이 사고틀에 빠지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서구의 좌파가 두 종류의 나뉘었었는데, 시장 경제에 대해 모호한 방식으로 거부하는 부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타협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시장경제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세 가지 경우의 수 밖에 없다. 이런 예를 들어 좀 그렇지만 콧물 한 사발과 고름 한 사발을 놓고 '어느 쪽을 마실래'라고 하면 어느 쪽이 나을까 고민한다. 정답은 안 마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프레임을 걸어 얘기하면 이런 바보 같은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왜 시장경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하나? 왜 여기서 사고를 시작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폴라니를 케인스의 아류나 마르크스의 아류로 얘기한다. 양쪽 다 잘못이다. 폴라니는 국가개입주의를 주장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나라 정치학계가 이런 식으로 폴라니를 전유한다. 국가 규제와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주장한 사람이라고 단순화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폴라니가 마르크스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유익한 서브노트로 여긴다. 물론 폴라니가 시장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이게 폴라니의 중심적인 논지는 아니다.
폴라니는 인간의 존재에서 시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 결과 폴라니의 결론은 시장경제는 허구다.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 들어 신자유주의가 중대 기로에 서 있는 현 시점에서 폴라니를 읽는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다.
2. 인류의 역사에서 시장의 존재란?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프레시안 |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냐? 이기적인 존재다. 개인적 이기심을 추구하게 돼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속성으로 지적한다. 두 번째는 합리적인 존재로 본다.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과 서로의 이익이 맞는다면 협조할 수 있다. 이를 이르는 말이 '호모이코노미쿠스'다.
가장 초기에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혼자서 다 구했다.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간이다. 많은 분들이 어릴적 동화로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셨겠지만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18세기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다. 루소, 아담 스미스 등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빈슨 크루소는 경제학의 단위로서 호모이코노미쿠스를 생각하는데 기본 바탕이 됐다.
처음 자급자족하던 인간이 필요에 의해 물물교환(예를 들어 노루와 생선)을 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분업이 생기고(노루만 잡는 '노루맨'과 물고기만 잡는 '낚시맨') 결과적으로 물물교환에 더 기대게 된다. 물물교환이 불편하니까 화폐가 만들어진다. 또 정당한 교환이 아니라 무력을 동원한 약탈을 하는 무리들이 생기고, 이런 무리들이 시장질서를 교란시키니까 시장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가 생겼다. 이기심과 교환, 즉, 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본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장은 종교, 정치 등 어리석은 이유로 억압하지 않으면 어디서나 자유롭게 생겨나고 어디서나 풍요를 보장해준다. 이게 시장의 기원과 속성에 대한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어이없는 일이다. 지금도 숱한 경제학 교과서에서 이게 진리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인류학적으로 뒤져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짓말 중에도 이런 거짓말이 없다. 학문의 이름으로 19세기 내내 울려 퍼진 주문이다. 폴라니는 인류학적 증거들을 통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이런 강력한 논리적 체계는 아담 스미스가 만들었다. 아담 스미스가 가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후대 학자들이 진리로 받아들였다.
물론 아담 스미스가 어떤 목적으로 갖고 만든 것은 아니다. 당시 서양인들의 인류학적 지식은 실제로 지구가 기원전 4571년에 창조됐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왜? 성서에 그렇게 돼 있으니까. 인류역사의 초기가 이랬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억측'이라는 방법을 썼다. 18세기까지는 문제가 안 됐다. 인류학적, 역사학적 발견은 19세기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역사학이 과학이라는 인식은 19세기에야 생겼다. 사실 제국주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인류학은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20세기 초엽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보면 동양 고대사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터무니없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도 마찬가지다. 역사학과 인류학 발전의 첫 번째 수혜자가 막스 베버다. 그 당시가 돼야 어느 정도 자료가 축적된 것이다. 폴라니가 이 책을 쓴 것이 1944년이다. 폴라니도 역사와 인류학 발전의 혜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신화(mytos)는 진위의 영역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로고스(logos)는 진실과 거짓을 꼬장꼬장하게 따지는 영역이다. 폴라니가 보기에 시장의 기원과 발전은 로고스 차원에서 어이가 없다는 것이다. 시장의 기원에 대해 아무도 로고스 차원에서 따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200년이 지나서 신화가 됐다. 마르크스도 이런 식의 물물교환이 존재했을 것이란 가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폴라니가 이걸 따져보자는 것이다.
물물교환 과정이 불편해 화폐가 생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화폐의 가치는 단위가 커서는 안 된다. 세계 최초의 화폐 중 하나가 기원전 650년경 리디아 왕국(지금의 터키)의 동전이 있다. 이 동전은 소 5마리 가치였다.
또 페르시아에는 수도에 시장이 없었다. 페르시아를 통일했던 첫 번째 황제인 키루스가 그리스인들이 협상을 하자고 하니까 '도시 한가운데에 터 잡아놓고 조직적, 체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는 시장을 죄악시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시장이 허구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과거에 있었던 경제는 어떻게 조직됐는가? 시장이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사회적 협업과 분업은 있었다. 인류는 처음 시작부터 노동분업을 했던 것은 틀림없다. 자유주의 신화의 맹점은 노동분업의 필연성에서 노동분업은 시장으로만 가능하다고 얘기한 것이다. 노동분업이 시장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시장의 신화는 무너지는 것이다. 여기서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시장이 아닌 노동분업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상호성과 재분배를 찾아볼 수 있다.
상호성 : 선물경제
첫 번째 방법 상호성은 쉽게 말하면 선물을 주고받는 형태로 노동분업을 조직하는 것이다. 쌍대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에 있는 두 사람(친구, 애인, 선후배, 이웃 등)이 교환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과연 이런 방식을 통해 곡식, 집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다 조달할 수 있을까? 인간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선물은 지극히 실용적인 개념이었다. 또 이런 방식으로 큰 규모의 경제적 분업이 가능했을까?
멜라네시아의 트로블리안 제도가 있다. 여러 개의 섬들로 긴 띠 모양으로 생긴 이 제도는 각 섬마다 생산되는 물건들이 다르다. 서로 교역의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 이걸 어떻게 조직했는가. 여기 사람들이 소위 '일촌'을 맺어 파도타기를 했다. A, B, C, D 등 여러 개의 섬에서 나는 물건들이 이런 교환을 통해 한 바퀴 도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수백명에 이르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고받는다. 이게 바로 선물경제다.
아주 간단한 조작을 하면 선물경제에서 쌍대성을 극복할 수 있다. 선물을 받은 쪽과 주는 쪽을 일치하지 않게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학 다닐 때 선배들한테 술을 얻어 먹었다. 하지만 그 선배가 나중에 우리에게 자기가 쓴 술값만큼 술을 사라고 한다면? 그 선배는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 그 대가를 나중에 누구에게 지불하게 되나? 후배한테 하게 돼 있다. 줄줄이 내려가게 돼 있다.
그렇다면 선물경제는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좋은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앞에 선후배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위계구조와 연결돼 있다. 이게 선물경제의 암이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교환되기 때문에 굉장히 실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따라 큰 규모의 경제를 조직하는 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질문이 가능하다. 시장경제에 있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경쟁은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다. 그렇다면 선물경제에서 경쟁은 어떻게 조직할 수 있는가? 앞에 얘기한 섬에서 보면 한 가족을 엄마의 오빠, 즉 외삼촌이 부양하게 돼 있다. 일년 농사를 다 지어서 여동생 집에 가져다준다. 이때 선물로 주기 전에 자기 집 앞에 곡식을 쌓아놓는다. 이는 자기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 또 자기가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인가를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다. 남들보다 더 좋은 곡식을, 더 많이 여동생 가족에게 선물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려는 경쟁이 일어나게 된다.
시장에서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느냐. 이걸로만 경쟁이 조직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수들이 무엇 때문에 경쟁을 했는가. 상금 때문인가. 아니다. 서로의 뛰어남에 대란 경탄을 하면서 나도 뛰어난 인간이 되겠다는 자극을 받아 경쟁했다.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는 올림픽에서 경쟁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인간의 뛰어남에 대한 찬가를 남겼다.
재분배 : 이집트의 피라미드
재분배를 통한 노동분업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수렵이다. 멧돼지를 잡을 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돈을 받거나 계약서를 쓰고 하나. 아니다. 다 같이 멧돼지를 잡고 그 결과물을 놓고 재분배에 들어간다.
상호성과 마찬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어느 정도 큰 규모의 경제를 조직할 수 있나? 국가 단위가 가능하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재분배로 경제를 조직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연인원 50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20년 정도가 걸리는 공사였다. 50만 명이 20년을 일하게 할 수 있는 경제는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했을 뿐 아니라 여기에 필요한 계산과 회계 역시 대단히 발전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현존했던 공산주의 경제도 전형적인 재분배 경제였다.
사회적 행동과 경제적 행동
상호성에서 경제에 참여하는 이유가 뭔가? 이익인가? 그렇지 않다. 선물이 실용적 측면이 있기는 아니지만 순전히 실용성만은 아니다. 선물의 사회적 관계, 서로 간의 정과 사랑을 강화한다는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서로간의 선의, 사랑이 밑받침돼 있다.
재분배에 참여하는 논리는? 의리, 충성 등 권력에 대한 복종의 논리가 깔려 있다. 참여 동기와 노동 분업이 조직되고 운영되는 원리가 순전히 경제적 돈 계산은 아니다.
위의 두 가지는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행위는 어디 있느냐? '묻어 들어가'(embedded) 있다. 상호성과 재분배에서 경제적 행동은 사회적 행동에 '묻어 들어가' 있다.
우리 현실로 돌아가보자.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 중에 직업을 순전히 경제적 이유에서만 선택한 사람이 있냐? 또 경제적 고려는 하나도 안 한 사람이 있냐? 다들 여러 가지 동기를 고려해 복합적으로 정한다. 고려해야 될 것 중의 하나로 경제적인 게 있다.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여기에 더 가깝다.
반면 시장경제는 어떤가? 참여하는 두 사람과 두 집단 사이에는 사회학 관계가 없다. 시장은 철저하게 돈 계산, 물질적 계획만 있다. 또 시장경제에서 참여 동기는 순전히 이익이다. 사회적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막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시장관계는 공동체 내에서는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시장은 공동체 바깥, 즉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만 발생한다고 했다.
여기서 인간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 신화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호모이코노미쿠스로 본다. 철저하게 이익에 기반한 인간이다. 그러다보니 시장이라는 패턴 설명해낼 수밖에 없었다.
폴라니는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나.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서양에서 2000년 동안 인문학의 핵심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뭔가였다. 이 질문의 답은 영혼이 있다는 것이고, 종교의 핵심 주제가 영혼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였다.
영혼은 욕망과 이상을 창조하는 매커니즘이다. 영혼이 있는 존재는 욕망과 이상과 꿈을 계속 생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가장 큰 특징으로 상상력을 꼽았다. 마르크스는 <경ㆍ철초고>에서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징으로 동물과 다르게 욕망, 이상, 꿈을 창조하며, 그걸 현실화하는 게 노동이라고 지적했다. 폴라니는 잠시 몇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인간이 일을 할 수 있는 동기는? 배고파서가 아니다. 인간 경제의 패턴, 사람의 노동을 조직하는 동기는 무한히 다양하다. 실제로 그렇다. 사람의 영혼에서 어떤 욕망을 끌어내느냐는 사회에 달려 있다. 인간의 본성은 딱 규정할 수 없이 다양하다. 이걸 조직하는 것은 사회다.
19세기 근대 유럽을 제외하고 인류역사의 전 기간을 걸쳐 시장은 인간경제생활에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핵심적인 물품과 욕망은 상호성과 재분배로 조직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요구되는 물품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사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물론 시장은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다. 하지만 액세서리 이상의 위치를 넘어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시장이 어느 정도 위상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많은 기제가 있었고, 실제 일정규모 이상 팽창하지 못했었다. 1957년 고대사연구회에서 폭탄 같은 책을 냈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논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 누구도 고대 경제가 시장경제였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3. 산업혁명과 기계제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을 어느 정도 시간이나 공간의 틀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산업혁명의 의의는 어느 정도 시간 틀에서 해석해야할까? 폴라니는 1만년 정도 시간 지평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산업혁명을 신석기 혁명과 대비 속에서 얘기하고 있다.
농경과 축산이 시작돼 정착이 시작된 신석기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은 다른 종이다. 군집을 이루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신석기 혁명이 가져온 충격에 비해 작지 않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도구나 기계가 인간 신체의 능력을 연장하는 수단이었다. 인간이 여전히 생산 활동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는 사람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자연이 생산활동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고 기계의 투입물이 된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 원리가 사람과 자연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기계가 중심이 되면 경제적 과정을 조직하는 원리가 기계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다. 인간과 자연은 부수적 투입요소가 된다.
이처럼 신석기 혁명으로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기계의 투입물로서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다루면 제일 편한가? 상품으로 다루면 된다. 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선 투입되는 노동과 원자재의 양이 탄력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필요할 때 투입하고 필요 없을 때 빼내기 위해서는 상품이 되는 게 필요하다. 이게 19세기 시장자본주의 경제였다.
폴라니는 과거 1만 년 동안 부수적이었던 시장이 인간과 자연을 먹어 버린 근본 이유가 산업혁명이라고 밝혔다. 앞서 중상주의 때도 많은 것이 상품이 됐지만 인간과 토지까지 상품의 형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게 일어난 것이 산업혁명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풀어야할 과제의 성격은 총체적 인간이다. 인간과 자연이 기계의 투입물이 된 것의 가장 큰 문제가 뭔가. 경제적 착취나 쪼들림, 자연파괴가 아니다. 사람이 짐승이 됐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영혼을 인정 안하고 스스로를 동물로 여기게 됐다. 이게 발전하면 전체주의적 사회가 된다. 파시즘에 대한 고발이다. 폴라니가 보는 19세기 자유주의 사회와 파시즘의 연속성이다. 기계제(산업생산)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병존하는 사회로 재조직해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문제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