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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교실 기사] 손호철, "아직도 진보 보수 타령인가?"
* 아래는 지난 6월 15일 사회정치교실 손호철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한 프레시안의 기사입니다.
"더 이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실용 정부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한국 사회에서는 '이념 논쟁'에 또 다시 불이 붙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며 시작됐던 지난해 촛불 집회는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보수 언론으로부터 '좌파'의 '반정부 투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은 서로를 '꼴통 보수'와 '좌파 빨갱이'로 몰아세우며 공방을 벌인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승패를 가른 민심이라고 꼽히는 문구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다시 '보수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일까? 민주당의 재집권은 곧 한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이 집권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15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월요 민주주의 학교' 강연을 맡은 손호철 교수는 "한국 정치를 볼 때 진보, 보수, 개혁의 의미를 잘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 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을 구분해야"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핵심 화두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회과학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에 혼란에 부딪혔다. 특히 한국에서는 두 가지 개혁을 뭉뚱그려 보고 있다. 민주 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그것이다."
우선 손호철 교수는 "개혁은 부단히 재생산되고 다시 등장한다"며 '개혁'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역동성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는 진보 대 (흔히 개혁 세력이라 부르는) 자유주의적 보수 내지 개혁적 보수 대 (흔히 보수라 부르는) 냉전적 보수의 삼분구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손 교수는 "민주주의 전선과 신자유주의 전선이라는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이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며 보수 세력으로부터 '좌파'라고 공격을 받았던, 또는 '진보' 정권이었다고 일컬어졌던 노무현 정부가 진행했던 개혁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손 교수는 "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의 역풍을 맞으면서 한국 헌정 사상 최초로 자유주의 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했다"며 "그 여세를 몰아 노무현 정부는 언론법, 국가보안법 폐지 등 자유권에 해당하는 권한을 확대하는 개혁 법안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노무현 정부 역시 오히려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을 개악하는 등 자유권 확대 측면에서 많이 기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손 교수는 "반면 신자유주의 개혁의 대표적 사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며 "그때 지지층과 열린우리당 내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 사실 '한나라당과 우리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정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예는 김근태 의원이 당 대표였던 시절인데 사실상 한나라당과 연정을 해서 비정규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호철 교수는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개혁이었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진보로 나가는 게 아니었다"며 "극우로 왜곡됐던 한국의 보수를 '글로벌 스탠더드'의 보수, 즉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로 정상화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면 진보인가? 자유민주주의는 틀린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가 된다. 국보법 폐지의 찬반 여부는 진보-보수가 아닌 보수-수구, 정상적 보수-극우의 갈림길이었다."
또 손 교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경제 규제를 했으니까 좌파 정부였다"는 주장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최고 좌파는 박정희가 아닌가? 햇볕정책 때문에 좌파 정부였다? 그 정책은 페리보고서를 베낀 것이었다. 복지 정책? 김대중과 노무현 복지 정책의 수준은 유럽과 미국 신자유주의의 5분의 1 정도였다. 두 정부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세력이었다."
손호철 교수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개혁은 좋은데 국보법은 폐지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다. 앞으로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게 민주 개혁인지, 신자유주의적 개혁인지 분류해보라"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 업보를 풀지 않는 한…"
이어 손호철 교수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 사태 역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짓밟고 싼 값에 대우자동차를 GM에 팔았다"며 "국부를 거덜내는 방식으로 팔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데 그 장본인인 민주당이 대우를 살리겠다며 폼을 잡고 나오고 있다"고 질타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김대중 대통령을 일컬어 'IMF의 서울지부장'이라고 했다. 당시 사상 최대의 외환보유고를 이뤘다고 하지만, 1997년 말 기준으로 한국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소유분이 수십 배가 증가했다. 나라를 팔아서 외환을 확보한 것이다. 그 다음 양극화와 비정규직 일상화가 이뤄졌다."
손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해 경제위기를 봤다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잘못됐었다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는데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는 건 이명박 정부만이 아니라 뉴민주당 플랜을 들고 나온 민주당도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역사성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그때의 국면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는 "결국 경제를 살렸지만, 결과로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며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원조 무능은 한나라당인데도 그런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 대다수는 경제위기가 아직 극복되지 않아서 못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못 사는 이유는 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극복됐기 때문"이라며 "이제 민생의 어려움은 경제위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미래가 됐다"고 전망했다.
"자유주의 10년, 결과는 민생 경제의 실패와 양극화가 됐다. 중산층과 서민 정부 표방하고 나섰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반서민적 정권이었다. 전두환, 박정희보다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결국 박정희 향수를 불러오지 않았나."
손 교수는 "그런데 이명박의 중요한 공이 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가장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반서민적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씻어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민주당을 보면 신자유주의 개혁이 민주 개혁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며 "민주당으로서는 민주 개혁만이 한나라당과 구별한 자신의 정체성인데도, 신자유주의의 개혁에 발목을 잡히는 딜레마에 빠졌다"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손호철 교수는 "결국 신자유주의 업보를 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어려움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