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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1193호 "시민사회단체 노년세대와 만나다"
20160913
[포커스]시민사회단체 노년 세대와 만나다
참여연대, 푸른 시니어학교 이어 ‘배움의 공동체’ 서클 운영 시작
“환갑을 맞으며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해는 이미 석양이고 시간은 다 가는데,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인생의 의미도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한심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 거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직장을 그만뒀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우리 사회는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는데도 깨어나야 할 당사자인 노인들은 의식이 잠들었거나 세뇌되어 사회로부터 존경은커녕 손가락질을 받고 천덕꾸러기로 외면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참여연대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푸른 시니어학교의 수강생이 참여연대에 남긴 후기 글의 일부다. 한국 노인들의 생활의 질이 세계 최악이라는 점은 뉴스도 아니다. 한국 노인들은 환갑이 넘어 은퇴를 해도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렵다. 65세 이상의 인구 중 일하는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제일 높을 뿐더러, 빈곤층에 속한 노인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에 달해 2위 그룹을 멀찌감치 앞지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TO) 통계상 70세 이상 인구의 자살률 역시 2위 그룹의 2배에 이른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생애의 발견>에서 한국 노인들의 모습을 “남은 시간을 침착하게 마무리해야 할 노년이 어느덧 눈칫밥을 먹으며 궁핍에 내몰리는 지경이 됐다”고 묘사했다.
시민사회 안에서도 노년 세대와의 접점 찾기가 부족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푸른 시니어학교를 이은 참여연대 아카데미의 ‘배움의 공동체’는 소개글에서 “노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은 매우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이제 시민사회와 노년 세대가 만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는 2015년 봄학기부터 노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강좌를 진행했다. 9월 2일부터는 새로운 노년 교육을 위한 배움의 공동체 서클을 운영하고 있다. 2012년 노년유니온이 출범한 이후 2014년에는 각각 한국노총, 민주노총 조합원 출신이 주도한 시니어노조와 노후희망유니온이 탄생했다.
2014년 7월 노년유니온 등 단체들이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줬다 뺏는 기초연금'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김정근 기자
노인 스스로 사고하고 성찰할 수 있게
참여연대 아카데미의 경우 주은경 원장이 2014년 3월 취임한 이후 노년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 원장은 부친이 돌아가시기까지 2년 정도 함께 살면서 노인복지 현장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주 원장은 “아버지를 위해 주변 경로당이나 복지관을 많이 돌아다니며 나도 몰랐던 노인복지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노인을 위한 갖가지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노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기보다는 취미 소비에 그치는 교육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주 원장은 노년 세대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년 세대 당사자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80세에 가까운 분도 자신을 노인이라고 부르면 싫어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노인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시혜적인 복지만 안겨주기보다는 노인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시민교육이 있어야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바뀔 것”이라며 노인 관련 강좌를 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푸른 시니어학교의 교육과정은 일반적인 노인복지관의 교육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의 노인 세대와 정치’라는 제목의 강의를 통해 현재 노년 세대가 10~20대였던 1940~50년대의 현실을 분석했다. 현재 노년 세대의 기본적인 정치의식이 형성된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세대 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취지에서다. 조흥식 서울대 교수는 노인복지를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서는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오랫동안 성장담론이 복지담론에 비해 우위에 서 왔기 때문에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인복지 지출이 가장 적은 편에 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 수강생은 후기를 통해 참여연대 강의를 듣고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승자독식 불평등사회, 극단적 이기주의와 무너진 도덕성 등을 개선하고 바로잡기 위한 운동도 꾸준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미활동 이상의 시민교육 필요성
주은경 원장은 국가가 노인복지를 위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시민단체도 자신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 원장은 “복지는 인간의 생존과 관계를 모두 책임지는 것이여야 한다.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노인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시민사회는 정부가 다 책임질 수 없는 노년 세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노년 세대의 반응이 굉장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노인을 대상으로 취미생활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시민교육 내용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배움의 공동체서클’의 진행팀을 맡고 있는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은 노년 세대의 생존과 관계를 모두 개선할 수 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년유니온은 노년 세대가 교육이나 봉사활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서로돌봄은행’을 만들었다. 서로돌봄은행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 오가는 은행이다. 어떤 조합원이 몸이 아픈 다른 조합원을 위해 1시간 동안 장을 봐왔다면 그는 자신의 계좌에 1시간을 적립하게 된다. 자신이 적립한 시간만큼 다른 조합원으로부터 원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노년유니온 조합원들 사이에서 우쿨렐레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우쿨렐레를 다룰 줄 아는 조합원이 다른 조합원들을 상대로 우쿨렐레 교육을 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계좌에 시간을 적립했다. 그런데 이 조합원은 남들의 돌봄이 더 필요한 조합원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계좌이체’했다.
고현종 사무처장은 “일방적으로 복지가 오가면 어느 순간 복지를 베푸는 쪽은 갑이 되고, 받는 쪽은 을의 입장이 되어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조합원들끼리 서로 복지를 주고받기 때문에 갑을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조합원들끼리 친분이 쌓여 노년의 고독 문제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봉사를 주고받으면서 친분관계가 쌓인 조합원들은 10~15명 단위의 소모임을 조직해 취미생활을 공유하거나 독서모임을 열기도 한다.
고 사무처장은 “직장을 은퇴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30년 정도는 노인으로 살아간다. 인간이 30살이 되기까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듯, 노인들도 충분히 배우고 변화한다. 노인들을 수동적인 존재, 외곬으로만 보는 사회적인 시선이 있지만 노년유니온 활동을 통해 노인들도 타인의 생각, 다른 세대의 문제점에도 귀 기울이는 모습으로 바뀌는 걸 많이 봤다”고 말했다. 노년유니온은 소모임의 경험과 참여연대 푸른 시니어학교의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이르면 내년에 노인 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할 예정이다.(박스기사 참조)
노동계에서도 최근 들어 노년 세대 조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노동조합 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1987년 6월항쟁 세대가 은퇴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민주노총의 경우 향후 10년간 현재 조합원의 40% 가까운 30여만명이 퇴직할 것으로 예상된다.
9월 2일 서울시 종로구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배움의 공동체서클 - 새로운 노년교육을 위하여’ 참여자들이 ‘세대로 보는 한국의 노년’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제공
한국노총은 청년고령사업국 신설
양대 노총 중 눈에 보이는 움직임을 보이는 쪽은 한국노총이다. 한국노총은 올해 4월 1일 조직을 개편하면서 조직사업본부 산하에 청년고령사업국을 신설했다. 강훈중 한국노총 조직사업본부장은 “60세까지 정년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실제 정년을 채우는 노동자는 10%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가 불완전해 은퇴한 노동자들이 다시 비정규직 일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고령자들의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노동조합을 통한 조직화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구체적인 부서를 신설했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의 노년 세대 조직화는 시니어노조를 통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노총 조합원 출신의 퇴직자들이 중심이 돼 설립된 시니어노조는 그동안 한국노총의 협력단체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정식으로 한국노총의 산하 연맹으로 가입할 예정이다. 박헌수 시니어노조 위원장은 “현재는 기자회견이나 토론회 중심으로 활동하며 조직 확장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나중엔 시니어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장과 직접 교섭까지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퇴직한 이후 선배들을 만나 보니 노인이나 은퇴자로 불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더라. 우리는 노년 세대가 인생의 선배라는 취지로 ‘시니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니어 세대뿐만 아니라 예비 은퇴자들에 대한 교육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니어노조 조합원들을 만나 보니 퇴직하기 10년 전부터 은퇴 준비를 해야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을 살 수가 있다. 퇴직 후 재취업이라든지 연금 문제 등에 대해 선배 세대가 먼저 겪은 점에 대해 후배 노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교육을 할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시니어노조는 한국노총 법률원과 협력해 노년 세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근로기준법 등 법률 강의도 준비하고 있다.
한편 민주노총에는 청년고령국과 같은 구체적인 부서는 없다. 다만 8월 22일 열린 민주노총 정책 대의원대회에서 노후희망유니온이 직장에서 퇴직한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의제를 제시해 대의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노년유니온, 시니어노조에 이은 세 번째 세대별 노년 세대 노조인 노후희망유니온은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정의헌 노후희망유니온 수석부위원장은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 발표문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민주노총 건설까지 앞장서서 역할을 했던 조합원들의 퇴직에 따른 개별화는 민주주의를 위한 큰 손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더불어 퇴직 노동자에 대한 전략적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창형 노후희망유니온 대변인은 “정책 대의원대회 현장의 많은 이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며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택배 일자리를 마련하는 등 일자리 창출과 노년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무조건 1번 찍는다’ 인식 깨야
취재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기존 정치권의 무관심이 노년 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 왔다고 진단했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은 “노인 하면 공원에서 멍때리고 앉아 있거나, 급식소에서 밥을 기다리거나,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고 싸우는 이미지가 있다. 김종인, 윤여준, 김무성 등 노년 세대 정치인들이 정치권을 좌지우지하면서도 평범한 노인들의 현실을 외면해 왔기 때문에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며 “노인 정치인들처럼 평범한 노인들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박헌수 시니어노조 위원장은 “어차피 나이든 사람들은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정부·여당에 가깝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안 써도 무조건 1번을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데, 시니어 세대가 앞장서서 이런 인식을 깨야 한다. 이런 고정관념이 깨져야 시니어 세대의 권익도 신장된다”고 말했다.
한편 주은경 원장은 소위 ‘486세대’라 불리는 민주화 세대가 노년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세대가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유아기부터 엄청난 관심을 쏟는다. 대안교육처럼 새로운 교육문화를 만든 이도 민주화 세대다. 하지만 이들의 부모 세대가 지금 70대 이상의 노인들인데, 노년 문제에 대해서는 교육문제만큼 관심이 적은 것에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 원장은 “이제 민주화 세대도 점차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참여연대도 창립 20주년이 넘어가면서 초기 회원들 중에는 노년에 접어든 분들도 있다”며 “노년 문제가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면 민주화 세대가 앞장서 변화를 이끌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나마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