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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 후기] 왜 나는 개까지 먹게 되었나
나는 왜 돼지도 먹고 소도 먹고 개까지 먹게 되었을까
책을 주문하고 배송위치를 확인하며 3일을 꼬박 기다렸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드디어 도착. 새옷을 입는 것 같은 설렘으로 책을 읽다 문득 오늘의 마지막 식사가 감자탕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퇴근 후 동물권 책을 읽으러 가는 길에 돼지고기로 허기를 채운 이 아이러니.
그날 저녁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메타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동물권에 관심이 있다고 하지만, 식탁에 돼지고기가 올라오는 모습에 단 일말의 불편함이 없었던, 아니 오늘따라 감자탕에 고기가 식어있다고 오히려 투덜대던 나.
작년 가을부터 동물권 독서클럽에 참여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동물권 반년만에 대충 동물권의 세부 챕터만 봐도 무슨 이야기할지 눈에 보인다. 도축과정에서 동물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는지, 육식이 얼마나 건강에 안좋은지, 동물이 어떻게 대상화 되고 있는지. 동물권 하면 나오는 3종 세트에 익숙해진 나는 이미 알고 있는(혹은 있다고 착각하는) 내용들을 재확인 하며 읽는다.
저자는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스튜에 들어있는 고기가 ‘개’였다고 한다면 지금의 느낌이 어떨지 물어본다. 이건 아마 우리가 반려동물과 식육동물을 분리하는 모순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하지만 저자가 던진 질문은 나에게는 육식에 대한 모순을 직면하기는 커녕 과거에 내가 개고기를 먹을 수 있게한 논리이기도 했다.
저자가 던진 “개고기는 못먹으면서 소/돼지/닭고기는 어떻게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거꾸로 “소/돼지/닭고기도 먹는데 개라고 못먹을 이유는 무엇일까?”로 둔갑했다.
태어나서 두번 개고기를 먹었다. 첫번째는 무엇인지 모른 채 먹었고, 두번째는 지인의 집에서 지인의 어머니가 내어주신 요리였다. 두번째로 개고기를 먹었던 날 나는 “다른 동물도 먹는데 뭐..”라는 생각으로 탕을 한숟가락 떠 입에 쑤욱 넣었다.
육식에 대한 인지부조화 조차 일어나지 않는 나에게도 책이 던져준 의미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먼저, 육식은 정상적이고(Nomal) 자연스러우며 (Natural) 필요한 것(Necessary)이라는 생각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것. 이 말은 육식은 사실 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보다 어떠한 신념체계의 산물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걸 말한다. 나 같은 뿌리깊은 육식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걸 의미했다.
두번째. 미각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 예를 들어 캐비어의 경우 세련되고 품위있는 상징으로 인식한 이후에라야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는 사례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실제로는 어떤 상징들로 구성되어있는지 돌아보게 했다. ‘난 언제부터 참치회를 먹게 되었을까’ ‘왜 장어를 먹을때는 몸이 든든해질 거라는 느낌을 받았을까?’ ‘어떻게 소고기는 명절 선물세트가 되었을까' ‘내가 한턱 쏠게의 코스는 왜 다 고기집일까?’
어쩌면 우리의 음식 소비는 미각적인 욕구보다 특정한 문화소비적 측면이 더 클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난 뒤 집에서 또띠아 피자를 만들어 먹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을 버릴 순 없다는 핑계를 대며 토핑으로 베이컨을 구웠고, 어설프게 배운난 베이컨을 굽는 동안 이 너머에 존재했던 돼지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나에게도 어느 비건의 간증(?)처럼 고기를 씹는 행위가 불편해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실패일까? 아니다. 고기를 씹으면서 반드시 먹어야할 꽤 좋은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요리를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씩 고기를 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식당에 가서도 되도록 고기가 없는 메뉴를 찾아보는 연습 중이다. 매달 6,16,26일 육이 들어간 날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 날로 정했다.
하지만 내가 우유와 요커트, 생크림, 계란말이(?)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회는 또 어떤가. 고기 소비는 줄지만 그 만큼 다른 유제품과 해산물 소비가 늘어나는 풍선효과가 일어나진 않을까. 동물과 생태계에 가하는 모든 폭력들이 비가시화된 이 도시라는 시공간 안에서 나는 지구와의 관계라는 끈을 늘 인지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질문이 일어난다.
비폭력. 나에겐 머나먼 길이나. 덜폭력이 되기 위한 관계망을 새롭게 연결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는 이들의 지혜가 늘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