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 하는 법 - 계몽의 전사, <독립신문>
오늘날 정보를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접하지만, 이전에 그 역할을 한 건 ‘신문(新聞)’이었습니다. 단순히 사실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1890년대 조선의 신문은 어떻게 등장했고, 영향력을 행사 했을까요? 사료와 ‘톡’하다, 네번째 시간은 ‘계몽의 전사,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등장한 1896년
독립협회보다 먼저 만들어진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영 일간지였습니다. 갑신정변(1884) 실패 후, 김홍집 등 17명을 중심으로 한 군국기무처를 기반으로 갑오개혁(1894)을 추진했습니다. 개화정책을 단행했지만 신임을 얻을 수 없었죠.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면서 민중계몽과 개혁정책을 알림으로써 지지를 얻기 위해 ‘독립신문’이 탄생했습니다. 이승만, 윤치호 등 개화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후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한 독립협회가 세워졌습니다. 초기에는 토론회와 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양성한 활동으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이들은 만민공동회를 열어 고종에게 개혁안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해산되었으며, 독립신문은 협회 해산 이후 정부의 탄압과 논조가 바뀌면서 1899년 폐간되었습니다.
순한글 사용, 권리, 그리고 문명화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을 내고, 세로쓰기를 하며, 투고를 받는 등 파격적인 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꼽자면, 국문 사용, 권리의 중요성 강조 그리고 문명화 교육으로 볼 수 있죠. 먼저 순한글을 사용함으로써 누구나 신문을 읽기에 수월하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당시 주시경이 참여했는데, 국문을 통해 만들 수 있게 도왔으며, 띄어쓰기를 강조했으니까요. 권리의 경우 천부인권과 법적인 보호를 강조했습니다. ‘백성마다 얼마큼 하느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라도 빼앗지 못하는 권리요(이하 생략)’ 부분에서 하느님이 주신 권리, 즉 천부인권을 자각하고, 권리의식이 있어야 더욱 높아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으로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명화는 독립신문이 추구했던 민중계몽과 연관이 있지만, 절충적 요소를 덧붙여 문명을 설명했습니다. 문명이 바라는 시민상을 제기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세력에 상관없이 공평을 가지고 재판하는 까닭에 압제 받을 필요가 없으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서술했습니다. 다만 문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찾기 어렵다는 게 아쉽지만 말이죠.
자발적으로 모여서 비폭력으로 맞선다
독립협회는 크게 3가지 운동을 했습니다. 자주 국권 운동(독립문 건립, 이권 수호운동 전개, 고종의 환궁 요청), 자유 민권 운동(국민 기본권 확보 운동, 의회 설립 운동, 국민 참정 운동), 자강 개혁 운동(국가 재정 일원화 요구)을 말이죠. 다양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자발적 결사체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 가치와 근대 윤리를 절충해 독립을 기초로 하여 서울이든 지방이든 모든 이의 마음이 모였다는 걸 부각했습니다. 이를 행동으로 나타난 게 만민공동회(1898)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재정장악과 절영도 침략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 이후 철회했죠. 이는 첫번째 비폭력시위 성공 사례로 였으며, 동학농민운동처럼 지방에서 일어났던 것과 달리 서울에서 먼저 열린 시위였습니다.
신문을 통해 민중 계몽을 하고, 여론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1896년의 독립신문. 그리고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드러낸 독립협회. 이 시점에서 민의를 파악하고, 깨어있는 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거리를 안겨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