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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하는 법 - 서양을 빌어 새 길을 말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서양을 빌어 새 길을 말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
위의 제목은 사료로 ‘톡’하는 역사 시간을 이끌고 계신 김정인 교수의 ‘서유견문’에 대한 핵심적 제목이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 밝히고자 하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봐도 좋다.
서양에서는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 마르코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이라고 한다. 마르코폴로의 큰 뻥치기 언어의 기술은 동방은 ‘황금이 가득한 나라’라고 환상을 심어 주는 바람에 이후 서양의 국가들이 앞 다투어 신대륙의 포문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결코 서양이 황금이 가득한 나라이니 우리도 빨리 힘을 길러 쳐들어가자 그런 류는 아니다. 어쩌면 그가 찾고 있던 황금은 당시 그가 본 서양의 사회정치적인 면모가 황금이었을지 모른다. 서유견문에서는 19세기 말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고 나아가서 세계의 정치적 시스템도 알려 주고 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수준 높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공부를 하였고 심지어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던 그는 친일파나 친미파로 분류되지 않는다. 강한 세력에 빌붙어서 한 자리 탐을 내던 그런 사람들의 부류도 아니었다.
오직 조선의 개혁을 꿈꾼 진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동방견문록을 읽고 탐험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은 탐험을 빙자하여 금 쟁탈전-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조선의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거나 행동으로 옮긴 견인차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 당시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얼마나 왕정 전제국가에 머물러 있던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는지 유길준의 행적을 통해서도 그 고민과 의지를 알 수 있었다.
겨우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이 주로 이끌던 개화파 지식인들이 뭘 알았겠냐고 하던 역사 시간 선생님들이 개화파에 대한 미숙함에 대한 언급이 오버랩 되기도 하면서 한국 현대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주화의 거센 파도 맨 앞에도 늘 젊은 20대가 있었던 것을 보면, 500년 지속되던 왕정국가에서 다른 정치 체제로의 변혁을 꿈꾸던 그들은 아마도 디지털도 따라 가기 힘든데 인공지능시대로 넘어가는 현 시대가 직면한 과도기보다 더한 요동치는 변화의 물결위에서 조선을 구하고 살리고자 하는 정치적 몸부림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개화기 지식인들을 알고 싶어하는 강한 호기심을 이끌게 되었다.
사실은 서유견문이라는 책 제목만 알고 있는 수준에 머물던 내가 이번 사료와 ‘톡’ 하는 시간을 통하여 ‘역사 까막눈’이 조금씩 눈 떠가는 새로운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첫 시간인 ‘알렌의 일기’를 통해서도 이방인이 본 갑신정변이 결코 3일 천하로만 끝나지 않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사료가 가지는 힘이 객관성 뿐만 아니라, 시사하는 가치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새로운 쟝르를 재창출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서유견문은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말의 지식인이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이 앞으로 어떻게 개혁을 하며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지 치밀하게 고민하고 또 자신이 본 것 중에서 나은 정치 제도 개혁을 통하여 그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국한문을 혼용하면서 책을 출간한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국민들이 읽을 수 있게 ‘적극적인 계몽’에 염원을 두었다는 강력한 의지를 서문에 밝혔다.
우리나라의 글자는 우리 선왕(세종대왕)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과 국교를 이미 맺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상하, 귀천, 부인,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길준의 국한문 혼용쓰기는 훗날 국민이 갖고 있는 힘이 나라의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여 한글로 펴낸 독립신문 창간에도 연결된다. 김정인 교수님에 의하면 이것은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면서 이왕이면 한글쓰기에 띄어 쓰기로 함으로써 한글을 더 읽기 쉽게 만든 주시경 선생과도 연결이 된다고 하셨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 서로 다 연결되어서 국민 계몽과 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유길준은 1881년 26살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게이오 의숙에 입학을 하여 공부를 하였다. 1883년 28살에는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미국행을 하면서 피바디 관장인 모스 박사로부터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기도 하였다. 이완용이 미국에 갔다 오면 친미파가 되고, 일본을 갔다 오면 친일파가 된 것 과 달리 유길준은 부정적인 의미의 친일이니 친미가 아닌 진정으로 그 나라로부터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 고민하는 관계의 친미,친일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영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유길준은 이 책에서 천부인권 사상과 같은 자유와 통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있다. 다양한 정치 제도를 설명을 하면서, 조선의 왕권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 체제가 가지는 장점에 대해서 많이 할애하고 있다.
김정인 교수에 의하면 고종이 입헌군주제를 취했더라면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침탈이 쉽게 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과 함께, 조선이 입헌 주제가 되는 것을 가장 막은 것은 당시 일본이었다고 한다. 입헌군주제 체제에서는 내각이 모두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국권침탈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 절대권력자의 도장인 옥새로 일사천리로 처리되는 과정과 다르다고 하였다.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끊임없이 입헌군주제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고종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일본의 이토우 히로부미는 다른 나라 신하인데 나에게 입헌군주제를 절대 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입만 열면 입헌군주제를 하자고 하느냐고 하였다는 일설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치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서유견문은 조선에서 출간되지 못했다. 1895년 일본 교문사에서 출간을 하였다. 서유견문의 목차를 눈 여겨 둘 필요가 있다. 서유이니 여행에 빠질 수 없는 세계의 바다나 강, 산 그리고 지리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으며, 정치, 사회적 풍습도 소개되어 있다. 무엇보다 김정인 교수는 제 4편의 국민의 권리에서 ‘통의’ 라는 정의와 제15편 여자를 대접하는 예절편을 소개하면서 서로 토론하는 과정도 가졌다. .
지유와 평등이라는 계몽주의 이후에 개념에서 유길준은 통의通義라는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국민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자유와 통의를 말한다.
자유는 나라의 법률을 삼가 받들고 정직한 도리를 굳게 지니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인 직분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는 권리이다.
통의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당연한 정리正理- 바른 이치, 도리-하고 할 수 있다. 통의는 인간에게 천연과 인위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 천연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히 생겨난 것이니 동요되거나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인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법률을 세우고 그에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것이다. 또 통의를 자세히 논의하자면 유계와 무계의 구별이 있다. 무계의 통의는 한 사람에게만 소속되어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유계의 통의는 세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사귀어 서로 관계되는 것이다.
무계한 통의는 사람이 타고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막론하고 세속안에서 어울리며 교제하는 자나 세속 밖에 처하여 혼자 살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라도 다 도달 할 수 있는 올바른 이치인 것이다. 유계한 통의는 인위적인 법률로 , 법률의 근본 취지로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답게 사는 권리는 현명함과 우둔함, 귀함과 천함, 가난함과 부유함, 강함과 약함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답게 사는 권리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도 올바른 원리다. 대중이 이 원리에 의하여 그들의 인성을 저마다 펴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권리는 각 사람에 따라 각각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권리는 하늘이 내려 준 공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치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유길준은 현 시대로 비유하자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민단체를 만들어 교육과 계몽운동을 다방면에서 평생 하였으며, 59세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리 _백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