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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 하는 법 - 정변의 시대를 함께 겪은 이방인 알렌, <알렌의 일기>
시대 흐름 간의 연결과 사진해석
'역사'라는 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시대에 맞춰서 해석하는 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설령 자유롭게 해석을 해도 오늘날 추구하는 가치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약간의 상식도 필요합니다. 사진해석도 중요하게 작용하고요. 그렇다면 당시 어떤 상황이었던 걸까요? 강화도조약(1876) 이후 조선은 개화기였습니다. 농민 투쟁이 많았고, 급진개화파들은 ‘평등’을 법제화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국왕권위는 낮아지고, 내각(의회)는 높아지는 이른바 ‘입헌군주제’ 도입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서양화 속도는 늦었고, 근대화를 향한 의지도 낮았죠. 이를 보여 주는 것이 광혜원(廣惠院) 사진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지원해서 생긴 이 병원은 당시 홍영식의 집을 썼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미 서양문화가 깊게 들어온 때였습니다.
선교사이자 관료였던 그, 안련(安連)
H.알렌(이하 알렌)은 1884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옵니다.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후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중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그는 주변 조언으로 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 후 갑신정변(1884)때 민영익을 치료해준 걸 계기로 신임을 얻어, 의료·선교뿐 아니라 미국 공사관 서기관(1890)에 역임하는 등 정치에도 관여했습니다. 특히 1903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동아시아 정책이 잘못되었다며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해임 이후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에 관한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국 독립을 위한 ‘친한적’인사 혹은 미국정부의 공식 외교관이었기에 ‘친한적’외교관이 될 수 없다는 평가로 봅니다. 전자의 경우 알렌이 고종의 독립 보전 및 근대화 정책을 지지했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후자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금광, 철도, 전차 등의 이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즉 신문물이 도입했을 당시에 관여했음에 주목 했습니다. 그렇지만 의학 발전에 노력했다는 점, 주한미국공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알렸던 점은 인정되고 있습니다.
알렌의 일기 속 1884년 그날
오늘날 <알렌의 일기>는 한국을 둘러싼 극동 아시아의 외교사가 어땠는지, 한미 외교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사료입니다. 또한 도착할 때까지의 항로, 생활사, 의학사 등 다양한 부문을 알 수 있기도 하죠. 그러나 여기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과 삼일천하를 다룬 기록입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12월 5일 금요일) 며 시작했는데, 문득 보면 정세를 모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두렵고 신경이 세워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고, 청나라와 일본이 싸우던 찰나였으니 피신해야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민영익을 밤새도록 치료하고 간호한 그는 갑신정변을 ‘최초의 암살사건’으로 지칭하며 급진개화파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다(12월 11일 목요일)고 추측합니다. 나아가 일기 후반부에는 계속 전투가 일어났으며, 외국인들이 계속 서울을 떠나고 있음(12월 20일 토요일)을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처형한 후 시내에 보인 시체더미가 있었고, 반역자의 시체임을 알게 되었다(1885년 1월 30일 금요일)는 걸 썼는데, 이는 삼일천하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 상상이 되고, 와닿았습니다. 물론 '일기'인 특성상 개인의 솔직한 마음도 드러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죠. (알렌이 민영익을 정말 싫어했다든지) 그래도 사료를 읽는 것이 조금은 낯설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