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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서클 땡땡,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느티나무 독서서클 땡땡은 페미니즘, 민주주의, 에로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명의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독서모임이다. 첫 번 째 모임은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가지고 시작했다.
<에로스의 종말>은 얄팍한 책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철학적, 미학적 차원은 실로 심오하다. 하여 얼핏 읽어서는 저자의 사랑에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고 곱씹었을 때에야 비로소 천천히 찾아오는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미 철학적 사유가 깊은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어 이 사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먼, 하고 곧장 한병철의 사유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어 유유히 유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용된 영화<멜랑콜리아>를 봐야 했다. 또,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장면에 불과하지만 그림들이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알아야했다. 그러고나서야 순수한 외부, 즉 타자의 파국적 침입과 구원에 대한 한병철의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 의미의 타자,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 에로스이고, 우울증이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는 것, 또 이 나르시시즘은 성과주의의 자아가 경험하는 대칭적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두 행성이 충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충돌하는 두 존재는 대칭적 존재들의 충돌로 바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가 이질적인, (반드시 이질적 이어야 한다) 또 다른 존재를 삼키듯이, 마치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여 완벽하게 흡수되는 모습과 비슷했다. 이것은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해 갈 수 있어야 하는 에로스의 본질을 잘 표현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아는 자발적 자기부정, 즉 죽음을 통해서 완벽히 비워짐으로써만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야 말로 에로스적인 삶인 것이다. 여기에 에로스의 부정성이 있다.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드디어 완결을 이루는 것이다. 헌데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부정성을 참지 못하고 제거해버림)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됨으로써 성애는 섹시함이라는 증식되어야 할 자본이 되고 벌거벗겨져 전시됨으로써 이질성이 제거되고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상처와 추락과 같은 부정성을 이제 사랑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피치노에 따르면 사랑은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인데 그 결과는 “변신”이다. 강력한 비대칭적 타자에게 흡수된 자아는 전멸하는 것이 아니라 변신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것을 헤겔의 말을 빌어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귀환”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에로스적 관계에서의 ‘근원적 거리 두기’ 이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와 합일 되는 에로스적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카릴지브란이 예언자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두 존재는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며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다고 우리에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여, 다시 에로스의 종말을 꼼꼼히 뒤져보았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근원적 거리 두기 라는 말을 발견했다. 근원적 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 으로 전락하고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준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기타 등등 어쩌구 뒷이야기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에로스의 종말 서문을 쓴 알랭바디우는 한병철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라고 했다. 거기에 슬쩍 덧붙여 말하고 싶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 랭보처럼 다른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바람구두를 우리도 어쩌면 신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좁은 두뇌 속에서 한병철과 같은 철학자를 만나고 이질적인 타자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독서모임을 계속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