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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짓는 기예 사랑 5강 - 사랑의 정치적 가능성 & 다시 세계를 짓는 사랑은 가능한가?
세계를 짓는 기예 사랑 5강 - 사랑의 정치적 가능성 & 다시 세계를 짓는 사랑은 가능한가?
*후기는 강연 내용과 강연에서 배부된 프린트에서 발췌했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참여연대와 엄기호 사회학자님께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청소년은 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오늘날 노동세계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보고 그들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따라서 어린 아이를 노동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있지만 몇 세 아이부터 어떤 노동까지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된다.
오늘날에는 아이에게 드는 경제적 비용이 증가하고 아이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득이 감소한다. 자식은 경제적 가치보다는 사랑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책임의 주체보다 권리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책임지는 주체가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감과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오늘날은 책임감이 강할 성인일수록 아이를 갖지 않으려한다.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이를 갖게 된다면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전부’ 알기 원한다. 고안된 출산과 육아 방법 등 산모보다는 아이에게만 관심을 쏟는다. 아이를 키우기 위한 최적의 준비를 하려하고 부모나 조부모의 지혜는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된다. 현대에는 오직 최고만이 있을 뿐이다. 부모에게 그들의 본분을 다하라는 압력이 가해진다. 가장 먼저 육아에 대한 정보를 최신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끊임없이 과학과 정보를 통해 더 나은 출산과 육아를 공부한다. 엄마는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대처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가진다. 이는 현대인이 신자유주의적 관리의 주체로서 사랑으로 키우는 자식조차도 투자와 관리를 통해 기르려는 모습이다. 비정한 엄마들,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는 엄마들만이 새로운 규칙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인간의 동물성이란?
말의 머리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가진 인간. 그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해방하고 본능적인이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허용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음성보다 인간의 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부모의 절규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사랑의 형식 중 하나인 필리아.
필리아는 성찰보다는 반사에 가깝다. 친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계산을 넘어 미소부터 짓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의 존재만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 현존 자체를 기뻐하는 사랑이다. 개인주의가 익숙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필리아적 사랑. 사랑은 계산하고 안전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다.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세계를 짓는 기예 사랑 5강 -(3) 2에서 3페이지 중]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취향이 사랑이며, 사랑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저들의 삶에 그 밀도와 의미마저 부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제 입장에서 볼 때, 위험이 부재하는 체제에서 존재에 부여하는 이런 증여는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전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이 오직 타자들에게서만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타인이라는 존재를 포기하는 것, 열정을 절약하면서 쾌락으로 채워진 즐거운 성적 타협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는 논리,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 합니다.
사랑의 경험은 일종의 도약입니다. 서로의 이익만을 챙길 단순한 교환처럼 인식되지 않으며, 미리 수익성을 기대하고 진행하는 투자처럼 장기간 계속 견디는 것도 아니므로 사랑은 우연으로 인해 발생되는 믿음입니다. 결국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르시즘을 넘어서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입니다. 사랑은 타자 존재 자체, 단절되고 재구성된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로 완전히 무장하고서 불쑥 솟아난 타자 그 자체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합니다. 우연 속에서 시작된 만남을 지속성과 끈덕짐, 약속, 충실성을 통해 우연을 고정시키고 운명에 이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에게 하나의 가능성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무엇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떤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 타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타자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타자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살면 안 된다.
강연을 마치며...
강연 도중 사람들과 사랑에 대해 토론해볼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사랑을 이런 강연과 이론으로 배워야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사랑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일 텐데 경쟁이 과열되고 개인의 삶이 고단해지면서 사랑이란 하나의 이상을 가리키는 우리와 거리가 먼말이 되어버렸다.
강의에 온 사람들도 사랑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현재의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강연에서 배운 사랑에 대한 이론과 지식을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 속에서 사랑이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헀다. 물론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며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이 강연을 통해 사랑의 면모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과 사회를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과 가치관에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고 강의실을 나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터덜터덜 발을 옮길 것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 없다.
문제를 인지하면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분명 어려울 것이다. 관성적으로 살고 있는 삶에 변화를 주는 건 사랑에 대한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들은 강연의 내용에 대한 고민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삶을 사는데 내려야 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인정을 베풀며, 개인에서 나아가 타인으로, 타인에서 나아가 사회로, 사랑을 하는 일은 쉽진 않겠지만 우리가 배운 사랑의 다양한 면모와 올바른 방법이이 존재한다는 걸 안 이상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