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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경계를 넘은 여성들> 변방에서 중심으로: 정칠성·강주룡
2017년 10월 23일 / 강사: 박정애
정칠성은 일본에 의해서 조선이 무너지고 기존의 신분질서는 붕괴되었으나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차별받았던 기생 출신이었다. 1897년에 태어난 대구 출신으로 기명(妓名)은 금죽(琴竹). 사회적으로 각성했던 사상 기생이자 사회주의 여성활동가로 그녀는 유명했다. 정칠성이라는 인물은 3·1 운동을 기점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일제시대의 가장 큰 민족항일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3·1 운동은 여성사에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큰 사건이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여성’의 존재가 두각을 드러난 사회 운동으로, 여성이 거리로 나온 발단이 되었다. 당시 많은 여학생과 기생들이 참여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을 하는 기생 출신 여성들은 당시 특이한 존대로 인식되었다. 기생들은 오랜시간 천대받았으나 조선시대부터 예학의 존재로서 기생들은 양반들의 대상으로서, 사회적 시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존재였다. 더불어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활동에 있어 보다 자유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사회주의 단체인 ‘조산여성동우회’를 참여 등 많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펼친다. “모든 여성은 무산계급이다.” 하는 사회주의 원칙적인 자세를 가지며 여성노동자를 여성운동의 주체로 삼았다. 1927년 근우회 발의인으로 참여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다 1930년 근우회 간부직에서 탈락하면서 그녀의 사회운동이 큰 틀에서 일단락 되었다. 전시체제기에 조선 내에서 편물강습으로 생활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방안으로서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좌익활동을 전개하다 1948년에 월북한다. 이후 행적은 불문명하다.
강주룡은 최초의 고공농성 여성노동자다. 1901년 평북 강계 출생으로 1921년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에 관여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이 후 1926년 평양으로 이주하면서 여성노동자가 되었고 1931년 5월 4일 평양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30년을 남짓 채운 짧았던 그녀의 일생은 치열했던 노동자의 항쟁 자체였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노동자 파업투쟁을 이끌었고(1931년 5월 평양 평원고무공장) 이 후, 일제에게 노동운동의 주요인물로 체포되고 석방되는 과정에서도 고공 농성과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6월에 평양적색노조연루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다음 해 6월에 병보석으로 출감된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일생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에 노동자이면서 여성이었기에 열악했던 대우와 처지이다. 누구에게 어려웠을 경제적 불황이 더욱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다. 근로환경의 열악함은 물론이고 성추행과 같은 신체적 위협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정칠성 강주룡은 모두 하나의 시대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그녀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받았던 기생의 신분으로부터 그리고 사회적 위기(대공황)에 더욱 내 몰린 여성노동자부터 보다 진전하려고 했던 여성들이었다.
- 자원활동가, 정새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