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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교수님의 그리스철학읽기 제1강 니체
제목: 니체 <비극의 탄생>, 그리고 비극과 정치
-비극을 읽는다고 했을때 읽어야하는것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 왜 희극과 비극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말을 한다.
-시학이 고대에 비극에 대해서 가장 완성된 책이라고 했을때 근대에 가장 완성된 책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
-니체는 인생은 고통스럽다고 한다. 누구나 고통하지만 그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노력하지만 그 고통을 넘어서면 또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니체는 내가 생각하는 원리와 세상의 원리가 너무 멀면 절망을 느낀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개인은 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 더 나은 삶을 지향함으로써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니체는 이 개념을 뒤집어서 고통과 간극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 그 고통을 외면하면서 갈구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잘못되었고 그래서 기독교를 싫어한다.
-지옥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이 만들었다. <국가>를 읽으면 글라우콘이라는 사람이 겉으로는 정의로운 사람 속으로는 사악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해낼까?라고 물어봤을때 플라톤은 지옥으로 간다고 답변한다. 그러면서 천국론, 지옥론이 자리잡는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기독교의 내세가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신의 말씀을 듣는 형이상학자, 절대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를 경멸한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자기비판의 시도 15년 이상이 학생을 지도한 이후에 자기 이상에 대해서 써놓는 책이다.
-‘계보학’ 새로운 방법론을 내세우고 20세기 푸코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계보학”은 우릭가 당연히 믿고 있는 진실을 뒤집는 것이다. (Ex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콜롬버스 그렇다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들이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을 계보학이라고 한다.
-1844 년에 태어나고 20세기 입구인 1900년대에 죽었다. 근대는 인간의 시대라고 신은 죽었다라라고 말하면서 죽었다. 신외에 다른 대체물을 찾지못하고 죽었다. 실존주의를 열었던 사람이다. 실존주의는 사실자체를 받아들고 사실대로 살아가야한다고 하고 후에 칼 슈미트, 막스 베버와 같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를” 나치에게 잚못 이용되었다.
-초인이 영어에서는 overman 극복하는 인간이라고 해석된다. 독일어 표현에는 플라톤식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이 사람은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이다. 선악의 개념 구분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선악을 구분하면 결국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삶을 가지는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 도덕에는 옳고 그름이 정해져있다. 니체는 칸트적인 도덕형이상학을 싫어하지 않는다 자기안의 기준을 만드는 것에는 동의는 했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덕의계보가 온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비극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판의 배경표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배경표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사진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체벌받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본인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태도,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것을 긍정하는 개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한 위버맨시*(독일어로 초인) 이 되려면 체벌을 받더라도 재판을 받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투쟁하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표지에 대해서 니체도 강조한다)
-반시대적고찰 니체가 사용하는 내용 반시대적 고찰 4편으로 만들어져 있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가 존재한다. 교육자로서의 쇼팬하우어 여기의 이야기들이 다 들어가 있다. 니체를 입문할때 교육자로서의 쇼팬하우어에 관한책을 읽으면 좋을 것.
-니체가 말하는 핵심은 자신의 삶에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꼬임에 넘어간다. 모든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을 다루는 사람들 절대적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지금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세에 가져야하는 형이상학이다. 이데아의 형이상학이 아닌 현세의 형이상학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쉬는 시간
-비정규직 남성노동력을 비정규직 여성노동으로 대체했다는것 / 페미니즘은 분배투쟁과 인종투쟁을 해야한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은 버틀러다. 미국은 버틀러와 프레이져다. 왜냐하면 버틀러가 인종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인종투쟁을 통해 가족주의를 해체하려고 한다. 남성위주의 분배체계 복지체계 역시 부술려고 한다. 프레이져는 여성중심의 복지사회를 없에는데 여성주의가 활용되었다고 한다. 제1세게 여성을 위해 제3세계의 여성들이 다 비정규직이 되었다. 발전된 국가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버렸다. 신자유주의와 마주해서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1장에 본인이하고 싶은 이야기가 매우 많이 담겨있다. 이것을 처음부터 이해할려고 하지말고 이해되는것만 읽고 나머지를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비극의 탄색의 원래 제목이 비극의 탄생, 그리고 정신과 염세주의다. 그리스인들의 세계가 가장 이성적인 시대였다. 이성의 시대와 빛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보면 이들에게 염세주의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실제 우리가 비극이라고 하면 쇼팬하우어 삶의 갈망이 의미없다는 해석을 생각한다.
니체의 비극의 해석은 다르다. 그리스 시대의 번창하는 비극을 죽인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학문이라는 것들이 진리를 찾는 활동이 우리가 체념하고 싶지 않아서 절망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 좌절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이건 학문의 문제,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하기 싫어서 이상적인 무엇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학문의 토대에서는 인식되기 싫기 때문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그리스 비극을 형성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폴론적인 것에 정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디오니소스의 본질은 도취다. 도취는 사람들과 환의의 순간에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은 보통 정치에서는 혁명의 순간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기준을 상실하게 된다. 로베스 피에르같이 엉망징창이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기준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자유 프랑스 혁명의 기본정신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혁명의 과제가 된다. 기준을 상실해버린다. 그런 순간의 도취적인 순간을 말한다.
아폴론적인것 – 기준이 있는것 이성이 있는것/ 디오니소스 – 기준이 무너지는 것 그리스 철학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넘나드는 것이다.
-서울대 김주휘 교수님 니체에 대한 글을 같은 구조로 써놓앗다. 그분의 글을 찾아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극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니체의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지만 태양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플라톤적인 아폴론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라투스를 디오니소스의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지 계속 물어보게 된다. 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큰 축복을 가져온 것이 광기라고 한다. 그리스인들이 휠씬더 낙천적이고 논리와 더욱 열성적으로 더욱 학문적이되었다. 자기한테 닥친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학문의 세계로 도망갔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들어가는 순간이 아니였을가 생각을 한다.
-니체가 언급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의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한다.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모든 척도로써 예술을 부정한다.
-삶은 가상, 예술,, 기만, 광학(렌즈를 빛에 대면 바뀐다 절대적인 것이 없다) 오류의 필연성에 의해 삶은 욺직인다. 무조컨적인 도덕앞에서의 삶 이게 가지고 있는 나쁜 측면을 이야기하면 신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신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른 전쟁을 했다. -성경이 다양한 언어로 읽으면서 다르게 해석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신의말씀을 듣고 복종하라고 말하고 이것이 신의 전지전능함이다. 이는 반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비도덕적이라고 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체념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에서는 올바른 일을 해서 문제가 생긴다. 내가 옳은일을 했는데도 상황이 더 나빠진다면 과연 이 삶에 집착할 가치가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 비극의 정신의 체념으로 인도한다. 이는 디오니소스가 말한 것과 다르다.
-쇼펜하우어가 아폴론, 디오니소스의 해석을 한다. 아폴론적인 것 – 조형예술 디오니소스적인것 – 음향예술/ 1. 쇼팬하우어의 아류적 2.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뒷받침하는 고증의 자료들이 없었다. 고증문헌자료가 없었다.
-과연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같은가?
쇼펜하우어의 비극은 삶을 체념하게 만드는 것이였지만
니체의 비극은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쇼펜하우의 염세주의는 체념 니체는 내 앞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긍정합니다. 쇼팬하우어는 삶 자체가 저주라고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어디서 나오냐면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여됬기 때문이다. Will 이 나쁜이유는 부족과 결핍을 나타내기 때문에 현실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부족과 결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왜 니체가 Will대신 자유를 말하지 못했을까?) 왜 끊임없이 체워놓지 못하였는가? 그레서 쇼펜하우어를 읽은 많은 청년들이 자살을 했다. 사실 쇼펜하우어에게 자살은 무엇에 의지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불교의 선의 의지와 같은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신을 믿는 이유는 철저한 의심 후 믿을 수 있을기 때문이다. 체워 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비워놓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체념을 순수한 말이라고 한다.
-순수한 앎 의지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순수하게 말을 하는 것
-비극은 무엇인가? 세계와 삶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이유 여기서 비극의 정신. 여기서 비극의 정신이 존재한다. 비극의 정신은 체념으로 인도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난 것 거기서 어떤 길을 찾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그것이 자유이자 표상이다. 거기서 나온 주인공들이 정말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그속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하는것 그리스 비극에서 무엇을 해야 옳은지? 그 어렵고 난감한 상황에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질문이 철학과 통하는 것이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반대로 체념하지 않고 투쟁을 하는 긍정을 하는 그리스 비극이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보면서 우리가 의지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 채념하는 것이 잘못되엇다고 한다. 이 의지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시미즘은 개념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 받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루소가 말했듣이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가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90%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지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독창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쇼팬하우어의 체험, 쇼팬하우어는 플라톤적인 구조를 세우고 이데아를 만든다. 여전히 쇼팬하우어는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가두어져 있다. 현세안의 삶을 가지고 있다. 체념하고 바라는 것 바라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고통받는 삶 자체를 긍정하라는 의미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니체가 가지고 있는 측면은 아폴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니체와 쇼팬하우어는 다르다.
느낀점
-이번 여름 우연치 않게 아론슈스터와 슬라보예 지젝 교수님의 조교를 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도 욕망 그리고 욕망이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경계를 통해 표출되는지에 대해 말을하고 그것 안에서 보여지는 욕망의 미학에 대해서 설명한다. 욕망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과 필연적으로 죽거나 비극을 맞이해야하는 인간을 미학적으로 표현하신분들이 이 두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 욕망의 근원은 거울단계, 성욕(섹슈얼리티)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보았고 이것은 아주어린 어린아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때 당시에도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욕망으로 인해서 어린아이가 불안에 시달린다고 했다.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과 욕구에 의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탈출하려 하다보니까 비극을 맞이한다. 하지만, 비극은 미학적 일수도 있다. 비극자체는 누가보이는 것에 따라 상대적인것이다. 그렇기에 과연 비극을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비극은 욕구가 표출되는 어쩔 수 없는 장면들이고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겪는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음의 미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질문을 던져본다.
자원활동가 류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