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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_3강 이성애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제 3강. 이성애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앞서 강의에서 계속해서 성차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성차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성차’라고 불리는 것이 과연 정말 성차라고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들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남녀 이분법적으로 성차라고 불리는 현대의 구분법에서는 ‘성차’가 여성억압적이고, 차별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고민을 가지고 성차란 과연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듣고 인식했던 성차가 과연 있는지 말입니다.
한가지 비교를 해봅시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나는 부산사람입니다”, “나는 마흔 여섯살입니다”라는 물음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는 말은 분명히 다르게 들립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용기있다’ 혹은 ‘이상한 사람인가봐’라는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이성애자입니다”라고 밝힌다면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날까요? 결국 우리에게 이성애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여기는데, 그에 대해 얼마나 고민해보았습니까?
우리는 이성애자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입니다. 내가 왜 이성애자인지 고민해본적 있을까요? 아니면 이성애자인 것은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은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성애가 자연스러워서 그런 것인가요? 그럼 한국사회가 오로지 이성애적 욕망만을 권장하고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성애적 욕망은 어느 정도 이성을 좋아해야 이성애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성애적 욕망이 없는 것은 사회적 범죄인가요? 종교적 타락인가요? 도덕적 타락인가요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그럴 수도 있는 걸까요?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이성애 중심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성애라는 정체성은 결코 우리가 고민해보고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제 이성애 중심적 사상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 살펴봅시다.
기독교의 영향
기독교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이전에 서구에서는 그리스로마신화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최초의 여성을 ‘판도라’라고 여깁니다. 여기서 판도라라는 호기심이 많은 여자가 인류를 망하게 했다고 전승되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터교, 오르페우스교(BC 7C~6C)에서도 어리석은 여성을 강조합니다. 그 뒤에 수 많은 남성들의 타락은 주목받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여성의 자궁에 대해 여성의 몸에 존재하는 욕망의 생명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아담과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릴리스 이야기에서도 릴리스를 악한 여성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로마의 힘이 흔들리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강력한 메시아를 원하며 메시아 사상을 가진 기독교의 세력이 확장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이기 때문에 다신교 사상인 로마와는 배치되어 로마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탄압에 기독교 신자들은 각종 고문과 사형에 처하며 순교하게 됩니다. 303년에는 디오클레디안 황제의 기독교 탄압이 거세지면서 기독교 관련 문헌을 모두 없애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며 역전됩니다.
로마를 통일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인정하며 정치적으로 통합에 사용하려 합니다. 기독교가 지역마다 교리가 달라 분열되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통일하여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되어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제 종교가 통일되며 다른 교리를 가진 종교들을 이단화하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이단을 적으로 여기고 기독교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 종교와 사상들을 철저히 배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걸출한 신학자들이 나타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가 당시 유명한 신학자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황제에 의해 선택받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론(신의 은혜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을 주장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핵심은 성의 타락입니다. 모두가 원죄를 가진 이유를 아담의 정액으로 인한 타락의 대물림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황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받아들였을까요?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중 누군가가 인간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연결되고, 중세 후기에는 마리아 숭배로 이어집니다.
황제의 권력에 의해서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한가지 교리만이 존재하게 되고, 이외의 논쟁은 이단으로 여기며 말살해버립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뱀이 여자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즉, 뱀의 악함은 여성의 악함과 같다는 그 시대의 인식입니다. 그럼으로써 마녀사냥이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이제 고대로부터 시작되어 중세를 거친 종교의 역사는 여성을 헌신적인 성녀 마리아와 죄악을 가져온 여성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반면 남성은 순진한 아담과 영웅 예수님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억압과 여성차별은 주류 기독교 문화로부터 시작되어서 사람들의 인식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게 됩니다. 이성애 중심적 사고도 이러한 문화의 산물입니다. 종교는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기독교와 같이 사회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 사람들의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애만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동성애에 관한 인식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기 위해서 드라마와 영화에서 발견되는 동성애에 관한 묘사를 봅시다. <가슴달린 남자>, <번지점프를 하다>와 같은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동성애를 느끼게 되면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며, 자신들이 여자가 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정신병원을 찾아갑니다. 반면에 <구름이 그린 달빛>, <성균관 스캔들>, <선덕여왕>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동성애를 느낄 때 여성이 될 위험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성애는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관들도 동성애를 그리 문제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근대의 시대에는 남성 중심으로 남색과 여색이 나뉘었으나, 현대사회는 이성애를 중심으로 남성성이 상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의 곁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고, 남성성은 여성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즉, 현대의 남성은 이성애만을 통해서 남성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영화에서 동성애 감정을 가지는 남자들은 여성이 될 위험을 느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역사의 누적물들이 현대의 문화를 만들고 현대의 이성애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결국 역사가 주류의 문화를 만들고,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사회문화에 대해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성애만이 정상일까?라는 물음도 타당하게 제기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물음 없이 현재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게 된다면 어떠한 변화도 일구어낼 수 없습니다. 여성 억압에 대한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문제제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성애든 동성애든 무엇이든간에 하나의 사람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그것을 성별로 나누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