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역사학자 5인에게 시대의 길을 묻다 - 3. 21. 탈식민, 탈냉전의 대한민국을 꿈꾸다, 이신철
1. 왜 탈식민 탈냉전인가?
1) 역사인식과 미래
※ 촛불에 나타난 역사 인식
∙30년 주기설(25년에서 40년 사이)
예) 1894 동학농민운동, 1919 3.1운동, 1980 광주 민주화 운동, 1987 6월 항쟁 등
∙박근혜의 뿌리는 박정희 – 블랙리스트는 일제 시대에도 있었음.(독립운동 명단)
1970년대 이후 노조 명단(동일 방직)도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시작됨.
※ 역사 논쟁의 핵심 쟁점
∙건국절 논란 – 결국, 대한민국 정통성과 관련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미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공화정이었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은 국제법상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는 주장으로 우리 시각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하게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다. 10월 3일 개천절이 더 근본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 – 민주화는 정치인들만의 민주화가 아니다. 실제 싸운 건 전태일 열사와 같은 대중들이다. 산업화 또한 노동자와 농민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그 핵심 주역들은 모두 동시대의 같은 사람들이었다.
역사관 = 세계관, 곧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2) 1945년 이후, 제국주의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제국의 논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제국의 시대가 종말되었는가의 문제는 식민주의 청산의 문제이다.
2. 동아시아 냉전체제와 전후체제
1) 청산하지 못한 식민주의는 제국주의 질서(힘의 관계)가 온전하게 남아있다. 전후 사과를 제대로 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1년간 8만명을 학살한 독일의 사과도 그저 흉내만 낸 것에 불과하다.
2) 한국 식민주의 청산의 좌절
▪식민주의자 처벌의 사례 – 평안북도 내무부장 다카하시
1945년 9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241일 동안 구금과 조사, 유치와 석방, 출두와 귀가, 보석 등을 반복하던 중 1946년 8월 8일 “일본인의 유력관리를 불구속하여 취조한 것에 대해서 조선인 측 친일반동 분자를 구속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 의해서 조선인 측으로부터 비난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분간 구속한다.”라는 통보와 함께, 신의주 민교화소에 수용.
3. 식민과 냉전의 균열 – 제국의 지배를 끝내지 못해, 식민지배는 계속된다.
1) 동아시아 냉전체제 극복을 위한 해결 방안 모색
▪식민주의 청산과 신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성을 담보한 탈식민주의, 제3세계와의 연대 – 국제사회에 대한 식민주의 청산, 탈식민주의 촉구
(연대에 대한 국가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같은 길을 가는 나라와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 질의 응답
1. ‘대일청구권’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 일본과 처음부터 협의는 없었다. 북한에도 우리나라와 동일하게 ‘경제 협력 자금’으로 이야기했다. 독립운동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단지 돈을 더 많이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독일도 전후보상은 했지만, 식민지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김영삼 정권에서처럼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교과서에도 기록하고 기억하고 배상하면서 그 다음에 일본에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단지 100억원 받는 것으로 끝냈다. 이는 2만명으로 추산하는 위안부 한 명당 50만원씩 돌아간다. 20만명이면 5만원 배상받는다. 이러한 비용 또한 실제 교육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2. 배상문제보다 사과, 사죄가 더 중요한가?
- 식민지 지배는 범죄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인 유럽이나 미국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의 공동 교과서에도 ‘일본이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게 충분히 보상했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3. 65년 한일회담시 독도 폭파설이 있었는데, 사실인가?
- 신문기사, 미국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 김종필씨에게도 메일을 보냈으나 ‘아니다.’라는 답을 들었다. 독도가 분쟁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의지 표명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4. 중국은 배상 문제가 없는 배경은 무엇인가?
- 당시 연합국 일원인 모든 나라가 배상을 받지 않기로 했다. 실제 한국 전쟁 후, 중국은 타이완이 나간 빈자리로 인해 유엔 안보리에 가입하게 되고, 5대 강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베트남도 우리에게 학살에 대한 보상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저 경제 협력만을 바랄 뿐이다.
5. 위안부 문제가 정작 여성들의 목소리는 없이 남성들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미군 양공주, 기생 관광 등 다른 많은 문제도 있다.
- 위안부 문제는 분명 인권에 대한 반인도적인 범죄이다.
한 예로 마포에 위안부 관련 건물을 세울 때, 광복회가 가장 먼저 나서서 반대했다. 철저한 남성들만의 시각이었다. 이러한 지나친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처럼 보편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전세계에서 위안부 문제는 있었다. 유독 왜 일본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이 함축된 식민지 문제로 보아야 한다. 왜 전쟁 당사국이 아닌 한국여성 수만명이 그렇게 위안부로 끌려갔는가? 결국 이는 식민지라는 구조적 문제이다. 일본은 18세 이상, 직업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우리는 나이 제한 없이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모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