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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소개 기사 (한겨레 2009-07-11)
시장이 자연적으로 탄생했다고? 꿈 깨!
중상주의 국가, 세수 늘리려 개입
길드 폐쇄성 깨고 보편 시장 창출
‘자기조정’ 시장은 유토피아에 불과
사회 가치 키워야 시장 정당성 얻어
〈거대한 전환-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자유방임 시장은 국가 계획의 산물이다.”
이 통렬한 역설을 담은 책이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86~1964)의 주저 <거대한 전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가 최후의 불꽃을 피우던 1944년에 출간된 이 책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이후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비판서로 꼽힐 책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그 체제의 필연적 파국을 ‘논증’했다면, 폴라니의 이 책은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형성과 결과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그 체제의 내적 모순을 폭로했다. 시장자유주의의 모든 핵심 주장들이 그의 폭로를 통해 허구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 책의 출간은 “시대적 사건”이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에도 동의하지 않았던 탓에 이 책은 좌우 두 극단 사이에 끼여 냉전 시기 내내 학문적 표류 상태에 있었다. 그랬던 것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폭주와 그로 인한 전 세계 경제의 혼란을 겪으면서 이 책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됐다.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인 국제금융위기 이후 <거대한 전환>은 더욱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바로 이런 시기에 폴라니의 주저가 폴라니 연구자 홍기빈씨의 번역으로 다시 출간됐다. 신자유주의의 성찰과 극복이라는 세계적 조류를 거스르며 시장만능주의를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할 이론적 무기가 하나 더 확보된 셈이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하는 작업을 요약하면, 허구적 신화를 ‘폭로’하고, 실종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신화 가운데 이 책이 일차 과녁으로 삼는 것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신화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거점인 ‘자기조정 시장’ 논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두면 시장이 스스로 알아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균형에 이른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폴라니는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이 명제를 향해 직진한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 ‘자기조정 시장’ 논리를 따르면, 국가는 시장의 외부에 있어야 하며, 시장은 국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이 논리는 시장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탄생해 성장해 왔다는 가정을 전제로 삼고 있다. <거대한 전환>은 이런 주장들이 역사적 실제와 무관하게 시장자유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의 논리임을 드러낸다. 폴라니는 역사의 사료들을 꼼꼼히 추적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자 국가의 발명품임을 밝힌다. 중세 시대 이전에도 시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시장은 파편처럼 서로 고립돼 있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 구실을 한 것으로 이해되는 원격지 무역이라는 것도 중세 상인 길드의 이해관계 안에서 배타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오늘날의 시장과 유사한 전국적 시장을 탄생시킨 것은 16세기 이후 성립한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국가였다. 중상주의를 신봉한 절대주의 국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중세 길드의 폐쇄성을 깨뜨리고 보편적인 시장 창출에 앞장섰던 것이다. 시장의 보편화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와 폭력의 결과였다. 근대국가의 출현 과정의 부산물로서 전국 규모의 시장이 탄생했던 것이다.
폴라니가 더욱 관심을 집중하는 지점은 19세기 이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등장이다. 18세기 말 산업혁명과 그 혁명의 결과인 상품의 쇄도는 상품의 판매 공간 곧 시장의 확대와 발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은 여러 사회 제도와 관습의 방해를 받았다. 이때 국가가 개입해 ‘자유 시장’이 작동할 수 있도록 무수한 강제와 규칙을 부과했다. 이것이 바로 “자유방임은 국가 계획의 산물”이라는 명제가 가리키는 지점이다.
더 주목할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완성되려면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노동력이 돼 시장에서 사고팔렸다. 인간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인격과 자유를 말살당하고 한갓 사물의 차원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국가가 폭력적으로 개입해 인간이 사물이 되는 과정을 촉진했음을 폴라니의 저서는 낱낱이 보여준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국가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완성되고 작동했다.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실상 ‘완성’과는 거리가 먼 체제다. 폴라니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의 광포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거기에 거역하는 대항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이 ‘사탄(악마)의 맷돌’이다. 산업혁명과 이후 성립한 시장자본주의는 사회를 통째로 갈아 인간을 원자로 만들어버렸다. 사회의 모든 관계들은 부서져 시장에 먹히고 만다. 그러나 그런 시장의 파괴작업은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려는, 다시 말해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반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성에 반발하는 다른 힘 때문에 시장은 뜻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시장가격’에 따라 임금이 깎이거나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대기업에 밀린 자영업자들은 시장의 폭주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고 못박는다.
이 지점에서 폴라니가 발견하는 것이 ‘사회’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관계의 총체가 사회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사회를 제거하고 모든 것을 경제와 시장에 복속시키려 한다. 그러나 시장은 사회라는 더 큰 공동체의 일부일 뿐이다. 사회의 가치를 보존하고 키우는 한에서만 시장은 정당성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사회의 가치에 복무하는 한에서만 국가다운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 개입이냐 시장 자율이냐’ 하는 물음은 가짜 물음이다. 국가 개입은 ‘자유방임’에서조차 필수적인 것이었다. 질문은 ‘사회를 보호하는 국가냐, 사회 파괴를 거드는 국가냐’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회를, 인간을 보호하려면 시장의 악마적 파괴성을 제어하고 제압해야 한다. 시장과 국가가 공히 사회에 봉사할 때 인간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폴라니는 말한다.
칼 폴라니는
“극좌파 거부한 편협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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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확신에 찬 사회주의자였지만 편협하지 않은 사회주의자였다.” <거대한 전환> 프랑스어판에서 루이 뒤몽은 칼 폴라니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 평가대로 폴라니는 평생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지켰으나, 볼셰비즘과 같은 극좌적 대안은 거부한 사람이었다.
폴라니는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고향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자랐다. 부유한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엄격한 칼뱅주의 품성을 물려주었고, 보헤미안 기질이 강했던 어머니는 진보적인 기풍을 심어주었다. 폴라니는 16살 때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대학 시절엔 진보적 학생동아리 ‘갈릴레이 서클’을 창립해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서클에는 당대 헝가리 젊은 지식이들이 거의 모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죄르지 루카치도 있었다. 1909년 콜로스바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폴라니는 1914년 급진시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잠깐 동안 서기장을 맡기도 했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참전한 그는 폐결핵을 앓아 제대했으며,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평생의 화두를 얻은 셈이다.
종전 뒤 1919년 조국 헝가리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폴라니는 좌익 정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력히 비판했다. 새 정권의 내각에는 젊은 날의 친구 루카치가 참여하고 있었다. 1920년 혁명 정권이 극우 쿠데타로 무너졌다. 빈으로 망명한 폴라니는 1924년 이름 높은 경제 전문지 <오스트리아 경제>의 주요 편집자로 들어가, 대공황으로 빨려들어가는 유럽 경제를 조망하면서 세계경제의 흥망성쇠를 추적한다. 그때 폴라니는 오스트리아경제학파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론을 접했다. 이들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전도사였는데, 이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그의 필생의 과업이 된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한 뒤 영국으로 망명한 폴라니는 거기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반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그는 청년 마르크스가 쓴 <경제학-철학 수고>을 읽게 되는데, <자본>의 논리를 거부했던 폴라니는 여기서 인간의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깊이 공감했다. 또 19세기 사회주의 운동가 로버트 오언을 통해 ‘사회’를 발견했다. 1944년 쉰여덟의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을 출간한다. 이 기념비적 저작에서 그는 1차대전 이후의 격동 속에서 19세기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거대한 전환’을 이루고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공교롭게도 <거대한 전환>은 하이에크의 대표작 <노예의 길>과 같은 해에 출간됐는데, 두 책은 상반된 세계관을 품은 라이벌 저작으로 판명난다. 그 시절 하이에크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비판했지만, 폴라니는 자본주의 교정책으로서 뉴딜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생애 말기에 폴라니는 버트런드 러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냉전 시대를 비판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공존>이라는 잡지 창간에 참여했다. 이 잡지는 1964년 그가 숨을 거둔 뒤 간행됐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